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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과 색의 강렬한 대비… 마음의 눈으로 공간을 관조하다

입력 : 2024-02-22 20:04:52 수정 : 2024-02-22 20: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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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술전-박능생
‘이동시점으로서의 채집된 풍경’

여러 개의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
관람객들의 상상력과 지각 작용 독려
인간소외·기계화된 인간 등 주요 소재
도시 공간 시각적 대립 양상으로 제시
시대감각서 항상 앞서는 모습 보여줘

작가 박능생의 풍경화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선을 한눈에 보여준다. 한자리에서 원근법을 준수해 그린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포집한 것들을 작업실에서 파노라마 형식으로 조합한다. 따라서 여러 개의 시점이 한 화면에 담겨 있는데, 놀랍게도 관람객들은 이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고정 시점, 특정 시각에서 바라다본 대상의 사실성(리얼리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시각에서 느끼는 ‘현상의 경험’을 담았다”고 말한다. “도시 풍경에서 본 실제 대상과 매 순간 만난 상황에 감정이입의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라는 얘기다.

‘서울풍경도’

그의 작업노트를 펼치면 “눈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심안(마음의 눈)’으로 관조하는 것”이란 문구가 보인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실재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을 맛보게 하려 한다. … 내 작품은 보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참시키며 이들의 상상력과 지각 작용을 독려한다”고 적어두었다.

박능생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먹으로 그린 도시의 복잡한 풍경과 홍묵(紅墨), 청록, 갈색, 주황 등 두드러진 색을 입힌 산이 한 화면에서 맞서는 광경이다. 우리의 도시풍경이 산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작가는 이를 시각적 대립 양상으로 관람객에게 제시해 친근하면서도 이질적인 우리의 도시 생활공간을 일깨운다.

그는 전통 방식에 따라 제작하지만 현대적인 형식도 충분히 병행한다. 이 같은 융합이 갖는 효과는 우리에게 곧장 익숙한 풍경인 듯 아닌 듯 다가온다. 우리가 사는 익숙한 공간인 도시는 한편으로 자연과 동떨어진 어색한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는 곳곳에 알 수 없는 불안을 가졌지만 그것을 화려하게 화장하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익숙한 듯 어색한 듯 다양한 모습을 지닌 곳이다. 도시와 자연은 분명 우리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지만 미처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삶이다. 작가는 이질적인 도시공간을 살면서 이를 알지 못하는 현대인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는 밀집된 공간, 재개발되어가는 황폐한 자연과 도시, 인간소외, 기계화된 인간, 거대한 철골 구조의 빌딩 숲, 그리고 도심 속을 가로지르는 강 등을 소재로 즐겨 쓴다.

작가는 “익숙한 도시 모습과 자연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볼 때 느끼는 낯설고 오묘한 감정을 통해 저마다 살아가는 일상 공간에 보다 풍부한 의미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박능생은 시대감각에서 남들보다 탁월하게 앞섰다. 관념에서 실사(實事)로 나와서 심시정신(審時精神)을 구가한 것은 박능생이 가장 빨랐다. 심시라는 것은 내가 발붙이고 있는 시대의 특성이 무엇인지 물어 전대미문의 형식을 자기 시대에 드러내는 태도를 말한다.

비가 퍼붓는 풍경을 그린 최초의 화가인가 하면(‘그날의 흔적’ 2011), 홍묵(紅墨)을 도입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산행’, 2011). 서울의 산과 도심을 부분 절취해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걸작 ‘피레네의 성’(1957)을 떠올리게 하거나, 각기 형태와 용도가 다른 건물을 하나로 모은 뒤 화면 중심에 켜켜이 쌓아 기괴한 건축물을 만들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을 건물의 외피에 흘려 어그러진 시공간을 연출해냈다.(‘세월 쌓기’, 2011)

2009년에는 난지도 등 환경과 생태 문제에 눈을 떴다. 생태학이 대두되고 지속가능성에 관한 사유가 전 지구에서 집적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난초와 지초가 만발했다는 난지도(蘭芝島)는 우리에게 슬픈 기억이다. 그는 갈가리 찢긴 난지도를 그리며 건전한 생태의 당위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작품 ‘난지도’를 통해 표출하려던 것은 ‘나와 자연, 나와 타인은 서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타자를 내 몸처럼 아껴야 한다.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360도 전경’

‘번지점프’ 연작도 마찬가지다. ‘번지점프’는 강렬한 쾌감을 구하거나 위락의 향유로 놀이를 표방한 것이 아니다. 나를 강산에 투신하듯 온몸으로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산행(인왕산)’은 30개의 도마 위에 인왕산 등반 과정의 경험과 인상을 2년 동안 기록한 대작이다. 오랜만에 등정했던 산행에서 인왕산과 회포를 풀듯 곳곳에서 느꼈던 감동을 도마에 음각한 뒤 화사하게 채색했다. 왜 하필 도마일까. 평평한 박달나무가 편했던 걸까. 도마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도마는 ‘조(俎)’라고 쓰고 읽는다. 도마 조(俎)는 ‘제향 때 희생(犧牲)을 얹는 도구’다. 곧 평화와 안녕, 길복을 뜻한다. 인왕산은 문화를 수호하고 옛 선비에게 사단(四端)을 상기해 준 영산이다. 이 연작에는 문화에 대한 작가의 영원한 신뢰와 긍정이 담겨 있다. 산세를 표현한 필획의 힘과 전체에 감지되는 기운의 반향이 산속에 머문 화가의 감동과 함께 서른 개의 도마로 울려 퍼진다.

‘이동시점으로서의 채집된 풍경’이란 문패를 내걸고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세계일보 창간 35주년 기념 ‘세계미술전’에 가면 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인왕산-몽유도’를 비롯해 ‘스페인 톨레도’ 시리즈, ‘서울풍경도’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360도 전경’ ‘번지점프’ ‘남산에 서다’ ‘산행’ ‘제주 모필 드로잉’ ‘서울 모필 사생’ 등의 연작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19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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