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 개입도 어려워 진정성 있다고 느껴
이 시대의 1타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연은 모든 인간사를 통틀어 너무나 넓은 범위를 차지한다.” 그의 말처럼 삶의 총량을 따진다면 그중에 인과관계가 명확한 필연은 얼마나 될까. 나의 의도와 계획이란 건 또 얼마나 미약한가. 이 순간에도 나와 연결되었을지도 모를 숱한 우연들이 그냥 내 곁을 스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우연이 아주 소중한 자원이 된다. 예측도, 계획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오래 공을 들인 기획도 변수를 만나면 틀어지기 십상이다. 수정하다 보면 상황은 또 달라져 있다. 그러니 좋은 우연을 유연하게 빨리 잡아채는 게 더 효과적이다.
게다가 우연은 설득력이 있다. 사실보다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에서 소음과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면 계속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의도가 개입하기 어려운 우연에 사람들은 진정성이 있다고 느낀다.
2023년 8월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친 파울볼이 날아가 경기장의 쿠어스 라이트 광고 전광판 한구석을 때렸다. 전광판이 깨지면서 작고 검은 상자모양이 생겼다. 구장이 오타니가 타석에 설 때마다 “전광판을 부쉈으니 청구서를 보내겠다” “어떤 것도 박살내지 말아줘” 같은 재치있는 메시지를 띄우면서 ‘깨진 전광판’ 사건이 화제가 됐다.
쿠어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며칠 만에 맥주캔 한쪽에 검은 네모가 있는 광고 이미지를 만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야구장 전광판에 올렸다. 팬들은 환호했고 제품 출시 요구가 잇따랐다. 쿠어스는 빠르게 ‘깨진 전광판 에디션’를 출시했고 매진됐다. 쿠어스는 당시 몸값 5억달러의 오타니에게 한 푼 지불하지 않은 ‘오타니 광고’로 홈런을 쳤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쿠어스의 반응 속도다. 오타니가 파울볼을 친 것이 8월 26일, 쿠어스가 X(옛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광고 이미지를 게시한 것이 사흘 뒤인 8월 29일, 한정판 제품을 출시한 것은 9월 6일이었다. 광고 에이전시 리싱크가 소셜미디어 광고 아이디어를 고객사인 쿠어스에 문자로 보냈고, 게재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이었다. 미팅은 없었다.
쿠어스와 리싱크의 담당자들은 공히 우연의 포착과 대응을 얘기했다. “우리는 디자인적 관점에서 그 순간에 대응할 기회를 보았다.” “(공식) 일정에 나타나지 않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순간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지난 11일 슈퍼볼을 앞두고 테일러 스위프트가 도쿄 투어를 마치고 남자친구가 뛰는 경기를 보러 올 수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을 때,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이 이 답을 담은 다소 엉뚱한 성명을 내놓았다. 성명에는 스위프트의 앨범 이름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넣어두었다. 대사관은 일본과 미국, 스위프트의 도쿄 투어와 슈퍼볼이 교차하는 우연을 흘려버리지 않았다.
제주공항이 가까운 신라스테이 제주는 기상악화나 자연재해로 결항돼 출발하지 못한 손님에게 무료 숙박을 제공하는데, 이 프로모션의 이름이 ‘뜻밖의 행운’이다.
즉시 대응의 가장 큰 적은 과거의 경험과 사일로에 갇힌 조직 문화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우연에 매뉴얼이나 업무분장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서 이탈리아 선수로는 48년 만에 얀니크 신네르 선수가 우승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날 바로 신네르 선수와 이탈리아인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인생과 마찬가지로 테니스에서도 매번 이길 수는 없다. 규칙을 준수하며, 성숙한 태도로 경기하는 것이 풍요로운 도전”이라는 교황다운 말씀으로 울림을 주었다. 아마 이전의 여느 교황이라면 이탈리아 선수의 우승은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인숙 플랫폼9와4분의3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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