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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죽아’ 예찬 [박영순의 커피언어]

입력 : 2024-01-06 13:00:00 수정 : 2024-01-05 19: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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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어도 아이스 커피’(얼죽아)라는 표현만큼 특정 음료에 대한 애착을 서정적으로 담은 언어가 또 있을까?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임의 절대성’을 반어법으로 담아낸 소월이나, 슬픔과 기쁨이 맞서는 모순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역설한 영랑 못지않게 커피애호가들은 때론 시적(詩的)이다. 살을 에는 영하의 날씨에도 얼음을 가득 채운 커피를 마시는 것은 기호를 넘어 신념에 찬 행동이다.

차가운 커피를 선호하는 현상은 한국에서는 2018년 가시화했지만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민텔을 비롯한 여러 시장조사기관들의 분석 자료를 보면, 2017년 전 세계에서 새롭게 출시된 커피 제품 5개 중 1개가 아이스 음료였다. 미국에서도 냉커피 제품이 2013년부터 매년 적어도 10%씩 성장하더니, 2017년에는 커피 음료 신제품 중 56%가 아이스 커피로 전년보다 38%나 증가했다. 일본은 그해 RTD(Ready to Drink) 아이스 커피 부문에서 세계 시장의 18%를 차지하며 냉커피의 바람을 주도했다.

커피를 더욱 차갑게 하기 위해 포터필터를 얼음에 넣었다가 사용하는 방식이 나올 정도로 얼죽아는 커피 문화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얼죽아(Eoljukah)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K컬처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회자하면서 옥스퍼드, 메리엄 웹스터, 콜린스 등 유명 어학사전에 등재될 태세다. 무엇이 인류세(Anthropocene)의 우리를 ‘얼죽아의 세계’로 다그치는 것일까?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단숨에 들이켤 수 있는 아이스 커피는 매력적이다. 카페인이 몸에 퍼지는 15~30분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어 차가움으로나마 우선 정신을 일깨우는 데 냉커피는 요긴하다. 손에 쥐고 다니면서 마시기에 좋은 점도 노마드 스타일을 향유하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족’을 유혹하는 포인트이다.

혹독한 빙하기를 살아낸 인류에게 차가움은 유전자에 새겨진 노스탤지어일지 모른다. 아니라면, 변화와 불확실성을 꺼리는 본능이 아이스 커피를 택하도록 작동할 수 있다. 식어갈수록 거친 자극이 두드러져 손사래 치게 만들기도 하는 핫 아메리카노와 달리 아아는 수미일관함으로써 일편단심의 훈훈한 정서를 일으키기도 한다. 입을 대는 순간부터 얼음알만 남겨지는 빛나는 순간까지 관능을 건드리는 향미에 큰 변화가 없다. 변치 않는 존재는 우리를 위로한다.

제프 로트먼 박사가 2017년 “차가운 음료가 당혹감, 수치심, 죄책감을 줄일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심리학회에 게재했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거나 직무를 다하지 못한 스트레스는 당혹감과 같은 자의식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러한 감정은 얼굴이 붉어지는 소위 ‘뜨거운 느낌과 비슷한 신체현상’을 유발하는데, 이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음료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얼죽아는 고단한 자를 보듬고, 벼랑에 몰린 자를 구제한다.

틈틈이 뜨거운 음료를 마시며 체온을 올려야 했던 열악한 환경이 개선된 것도 얼죽아 현상을 가속화한다. 물리적이나 정신적으로 몸을 덥히기보다는 식혀야 할 상황이 잦아진 생활여건이 아아를 재촉한다.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 보이지 않았던 인간 본성의 따스한 면모를 포착해주는 것도 아이스 커피의 경쟁력이다. 컵을 감싼 손을 얼게 만드는 냉랭한 커피가 내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그윽한 향을 피워내고 농밀한 맛을 드러날 때 우리는 각성한다. ‘나도 존재 자체로 그 무엇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는 존재이구나…’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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