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병조판서 정언신이 주목했던 '차세대 군인'
‘노량해전’·‘명량해전’ 공통점…실종된 전투보고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노량해전)를 그린 ‘노량-죽음의 바다’ 영화가 순항중이다. 개봉 11일만에 누적관객수 300만명을 돌파했고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2019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위를 차지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의 이름과 행적을 모르는 이가 드물다. 그렇지만 그의 행적이나 그를 둘러싼 사실에서 일반 대중에 소개되지 않은 사실들이 아직도 많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행적과 주위에 있었던 사실 몇 개를 소개한다.

◆유성룡 앞서 ‘병조판서’가 추천했던 이순신
1591년. 임진왜란 1년 전 국왕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한다. 종 6품 현감 신분이었던 이순신을 승진 후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승진시키는 방식으로 품계를 7단계를 건너뛰어 정3품 전라좌수사까지 직급을 올렸다. 임금의 잘못을 논하는 임무를 띈 ‘대간’ 인 사간원이 급격한 승진이라고 반대했지만, 국왕 선조가 밀어붙인 결과였다. 조선 조정이 임진왜란 발발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는 유력한 근거 중 하나다. 이순신의 ‘급속 승진’에는 친구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성룡은 자신의 책 징비록에 이순신 천거 사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국왕 선조는 유성룡의 천거 이전부터 이순신을 알고 있었으며 중히 쓰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589년 7월(이하 음력). 선조는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에 부임할 주요 장수에 대해 논의를 하다 ‘이경록’이라는 장수와 이순신을 콕 집어 거명하며 “이들을 채용하려 하니 참작하라”고 지시한다.
유성룡의 천거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에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확률은 높지만 그 이전부터 선조는 이순신을 주시하고 있었고 전쟁시 주요장수로 쓰겠다는 생각을 내심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왜 이런 판단을 했을까.
선조가 ‘이순신’을 집어 중용의사를 비추기 반년 전인 1589년 1월. 조선 조정에서 국방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비변사가 조정 중신들에게 ‘불차채용’ 할 무장들을 천거해달라는 공문을 보낸다. ‘불차채용’이란 직급에 상관없이 채용한다는 의미로 현재의 특별채용에 가깝다. 비변사의 공문이 오기 두 달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선을 방문하면서 서서히 조선 조정이 전쟁의 기운을 느낄 때였다. 이 때 조정의 중신들이 추천한 인사들은 손인갑. 이빈. 신할. 조경. 이시언. 정담. 정발. 이복남 등으로 대부분이 임진왜란에서 중요 장수로 활동한다.
이순신도 이 때 추천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데,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으로부터 추천을 받는다. 즉, 오늘날로 따지면 이순신은 국방부장관이 주목한 차세대 군인이었던 셈이다. 정언신이 이순신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1582년 니탕개의난 때부터로 추정된다. 정언신은 당시 함경도 도순찰사로 난의 진압을 총괄했는데, 이 때 이순신이 정언신 막하의 군인으로 종군했다. 또 이순신은 1587년 녹둔도 전투에서 다수 여진족에 맞서 소수의 조선군만 데리고 성공적인 방어를 해내는데 이때 병조판서가 정언신이다. 즉, 일본침략에 대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던 조선 조정, 그 중에서도 핵심 고위관료였던 병조판서 정언신의 눈에 들었던 소장 군인이 이순신이었다.

◆이순신 전에 이준경이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만든 ‘불패 승리’의 배경에는 장군의 뛰어난 전략·전술적 역량, 강훈을 거듭한 정예 수군, 지형·지물의 적절한 활용 등이 거론되지만, 당대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이 일본 수군 주력인 ‘세키부네’ 대비 보인 우월성도 빼놓을 수 없다.
훗날 기록에 의하면 판옥선 탑승 정원은 130여명으로 추정된다. 일본 수군의 주력인 세키부네는 80여명 정도였다. 또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크고 단단했다. 일본 수군은 주로 근접전으로 상대 뱃전에 배를 붙인 뒤 백병전으로 선박을 빼앗는 식의 전술을 구사했는데 흔들리는 물살에서 더 높은 배에 올라타기란 쉽지않다. 또 판옥선은 평저선 형태로 지어져 연안의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도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선박 위의 화포들을 사용하기 쉬웠다. 조선 수군 승리는 대부분 화포의 우위에서 비롯된 경우들이 많았다. 판옥선은 소나무, 참나무, 가시나무 등 단단한 목재를 사용했고 함선의 두께도 굵었다.
판옥선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초기만 하더라도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 대비 크지 않은 맹선 위주였다.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년) 벌어진 을묘왜변 이후 조선 조정의 판단에 의해 새로이 제작된 함선이었다. 을묘왜변은 70여척의 왜선이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일대에 상륙한 뒤 전라도를 약탈하다 중앙에서 내려온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과 이준경의 형인 전주부윤 이윤경 등의 활약으로 막아낸 전투다.
을묘왜변 후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기존 맹선보다 더 커진 판옥선을 만든다. 판옥선에는 기존 총통(화포)을 개량해 실었다. ‘논의 끝에’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비용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을 필두로 한 외척의 득세와 빈부격차의 확대, 권력을 가진자들의 부패 등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함선을 만들고 화포를 싣는 것에 소극적인 사람도 있었다. 을묘왜변 다음해인 1556년(명종 11년) 사헌부는 “관아의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씻은 듯이 텅 비었는데 지난해 전선과 총통을 만드느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만약 아무 일이 없다면 총통을 꼭 만들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다행히 그 뒤에도 판옥선은 꾸준히 건조됐고, 총통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선 그 이후에도 신형 판옥선에 대한 실험이 계속 이뤄진 것으로 나온다. 누가 주도한 걸까. 기록은 판옥선 건조의 핵심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의사결정권자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게 한다.
을묘왜변에서 조선군을 이끌었던 이준경이다. 을묘왜변 후 이준경은 병조판서와 병조 업무를 총괄 감독하는 우찬성 직을 겸임했다. 판옥선의 건조와 총통의 주조는 이준경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이후 조선 조정의 움직임을 볼 때 이준경이 총대를 매고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으레 정부가 정책을 펼칠 때에는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뚫어내려면 고위 관계자의 명확한 지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윤원형과 대립각을 세웠던 이준경은 당대부터 추진력과 명확한 일처리로 유명했다.

◆‘노량해전’과 ‘명량해전’의 공통점은…전투보고서가 없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전투가 끝나고 나면 전투 내용이나 전후 상황,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기록하여 조선 조정에 보고하는 전투보고서, 즉 ‘장계’를 보냈다.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이 이 장계를 모아 ‘장계별책’이라는 책으로 펴냈는데 이 책에는 선조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보낸 장계 등 68편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치룬 전투 대부분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을 완전히 부순 1592년 8월의 한산도 대첩의 전후 좌우 상황은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파왜병장’이라는 이름의 장계로 충실히 기록했고 그 내용도 후대에 남겨졌다.
이순신 장군이 치룬 전투 중 직접 쓰지 않은 장계는 노량해전이다. 전투 도중 전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선 조정은 좌의정 이덕형으로 하여금 노량해전의 전말에 대해 보고하게끔 했다. 이덕형은 노량으로 상황을 살핀 뒤 보고를 올렸는데, 이 내용이 노량해전을 다루는 많은 영상물이나 기록의 토대다. 하지만 최고지휘관이 사망한 뒤 작성한 보고서라 정확한 전투 상황을 알기에는 한계점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치룬 전투 중 공식 전투기록이 없는 해전은 하나가 더 있다. 1597년 9월에 있었던 명량해전이다. 당대 조선의 공식 기록 중 명량해전에 대한 장계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오고갔던 외교문서를 정리해 실은 ‘사대문궤’라는 책에 명량해전의 전말에 대한 내용이 실려져있는데, 이 내용이 이순신 장군이 보낸 장계를 토대로 만든 문서로 추정된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는 명량해전 후 군관 송한 등을 시켜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장계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명량해전과 관련한 기록을 탐구할 때 조선 측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최우선 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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