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아흔일곱 엄마, 병원 외출 위해
10년 만에 꺼내신은 낡은 신발
힘겨운 걸음마다 콜타르 자국
무심했던 지난날에 눈물이 ‘핑’

구례를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나는 엄마가 백 살은 너끈히 살 줄 알았다. 1926년생, 올해 아흔일곱, 내년이면 아흔여덟.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다. 그래도 노인네 건강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엄마보다 더 건강했던 친구 한 분은 침대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진 뒤 급속도로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겁나는 것은 엄마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엄마 뇌의 변화를 딸인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외지로 1박2일 강연 간 나를 대신해 제자가 엄마를 보살핀 적이 있다. 원래도 적게 먹는 양반이 평소보다 더 안 먹어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이가 아프다고 했단다.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얼마나 됐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딸에게 말을 하지 그랬냐는 제자에게 엄마는 통증을 까맣게 잊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갸가 원체 바쁘잖애. 갸헌티는 비밀이여이? 죽을 날 지낸 사램잉게 나는 암시랑토 안 해.”

정지아 소설가

구례 지인들에게 잘하는 치과를 물어 당장 엄마를 데려갔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죽을 날이 지났다고 한다. 죽을 날 지난 사람이 병원에 가는 것도, 사람들에게 얼굴 비치는 것도 부끄럽단다. 그래서 엄마는 문밖으로 아예 나오질 않는다. 햇볕을 쫴야 한다고 아무리 채근을 해도 소용없다. 병원 가려고 엄마 신발을 찾았더니 밑바닥의 코르크가 부서진 상태였다. 비싼 신발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산 지 십 년도 넘은 것 같았다. 신고 나갈 일이 없으니 엄마 신발 새로 살 생각을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치과는 하필 이 층이었다. 엄마가 계단을 올라 본 게 아마 십 년도 전일 것이다. 업히자고 해도 엄마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난간을 잡고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 계단을 올랐다. 우두커니 엄마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내딛는 걸음마다 검은 콜타르 조각이 남았다. 그 흔적이 나의 무심을 비난하는 듯했다. 병원 바닥에도 뭉개진 콜타르 자국이 생겼다. 엄마가 진료를 기다리는 사이 차로 돌아갔다. 강연 다닐 때 가끔 신기도 하는 힐을 신고 내 운동화를 엄마에게 신겼다. 엄마가 진료하러 들어간 사이 콜타르 자국을 물티슈로 박박 닦았다. 검은 자국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가 가고 나면 오늘의 기억이 이 콜타르 자국처럼 마음에 남겠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염증이 잇몸까지 잠식했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의사가 자분자분 말했는데, 그 말이 더 아프게 심장을 후벼 팠다. 이를 뽑고 돌아오는 길, 낯선 상황에 놀란 엄마는 좀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자꾸만 물었다. “아이, 우리 워디 갔다 오는 질이냐?” 좀 전의 일은 다 잊었으면서 피아골 입구를 지날 때는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피아골이다이. 여그는 알겄다.” 이가 빠져 아이처럼 천진해 보이는 엄마는 젊디젊은 청춘의 시절을 생생하게 회고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이 겨울을 버텨 줄까? 한 해가 저물어가는 요즘, 엄마의 날도 급격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엄마의 끝이 머지않은 것 같은데 이상도 하지. 좋은 기억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평생 엄마에게 잘못한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많다. 내 잘못들만 치과 바닥에 남은 콜타르 자국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어쩌면 모든 자식은, 불효자다.

엄마의 끝만 머지않은 게 아니다. 열네 살 말라뮤트 호랑이의 끝이 더 가까울 듯하다. 털이 다 빠진 녀석이 하도 추위를 타기에 닭장에 쓴다는 보온갓을 달고 스티로폼으로 개집 외벽까지 에워쌌는데도 녀석의 수명을 연장하기에는 무리인 모양이다. 그제부터 녀석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안아서 일으키면 비척비척 걸어 나가 겨우 대소변을 해결한다. 강아지 때부터 키워 온 녀석과의 행복한 추억도 한 짐인데, 녀석의 죽음 앞에서는 엄마와 마찬가지로 미안한 것만 사무친다. 올해 너무 바빠 산책도 제대로 시켜 주지 못한 것, 녀석 홀로 늙어 가게 한 것, 이 미안함을 어쩌나…. 아직도 나는 이별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내 주변의 것들이 떠나가는 2023년과도.


정지아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와이스 지효 '상큼 하트'
  • 트와이스 지효 '상큼 하트'
  • 한가인 '사랑스러운 인사'
  • 한지민 '우아하게'
  •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