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팍팍할수록 이웃에게 마음을 더 쓰는 게 인간의 본성임이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의 참상이 전해지는 가운데 우리 군인들을 보는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다. 나라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서 밥값을 내주거나 커피를 대접했다는 미담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를 ‘연민’에서 찾든 ‘공동체의 연대감’으로 보든, 이성에 앞서 감성을 먼저 움직인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한 선행은 아니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뿌듯함도 갖게 한다. 고단한 일상에서 자신이 소모되는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쪽을 택해 실천하는 것을 챗GPT는 할 수 없는 매우 인간적인 일이다.

커피에서도 인간다움이 빛나는 문화가 있다. 100여년 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는 ‘인류애를 담은 커피 문화의 정수’로 손꼽힌다. 너무나 가난해서 한 잔의 커피값을 치를 수 없는 익명의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람이 값을 미리 치른 커피를 뜻한다.
소스페소(sospeso)는 사전적으로는 ‘미루어 둔’, ‘결정되지 않은’, ‘달려 있는’을 뜻하는 형용사로 이탈리아어다. 나폴리 사람들은 여기에 커피를 뜻하는 ‘카페’를 붙여 ‘커피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누군가 맡겨 둔 커피’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카페 소스페소를 제공하는 커피전문점은 입구의 잘 보이는 곳에 그릇을 놓아 둔다. 값을 미리 치른 영수증을 두는 곳이다. 커피가 간절한 사람은 이 그릇에 놓인 영수증을 들고 바리스타에게 가면 에스프레소 한 잔을 제공받을 수 있다. 영수증을 유리창에 붙여 두는 곳도 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은 길을 가다가 내걸린 영수증을 보고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방식 덕분에 기부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다. 기부자가 생색을 낼 일도 없고, 커피를 얻어 마시는 사람이 감사인사를 할 대상을 알 수 없는 ‘부담 없는 커피’이다.
이탈리아에서 산업이 발달해 상대적으로 삶의 여유가 있는 북부가 아니라 개발이 뒤처진 남부에서 카페 소스페소가 탄생한 사실도 우리를 사유로 이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할수록 인간은 서로를 돕는다”는 진리를 목도하기 때문이다. 카페 소스페소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 역시 나폴리가 2차 세계대전과 전후 복구로 인한 고난의 시기를 보낼 때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는 밥과 같은 존재이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한낮을 견딜 에너지를 얻는다.
커피를 마시지 못해 기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하나 둘 여분의 커피 값을 내기 시작했다. 카페 소스페소를 마시고 재기한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속속 이 행렬에 동참했다. 나폴리 곳곳에서 카페 소스페소가 넘쳐났다. 형편이 좋아지면서 카페 소스페소는 일상에서 잦아들고 성탄절에 치르는 이벤트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21세기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에서 카페 소스페소의 정신이 되살아나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라는 명칭으로 퍼져 나갔다. 공동체의 삶이 어려워질 때면 약속처럼 나타나는 카페 소스페소. ‘군인을 위해 몰래 계산된 밥값’은 ‘한국형 카페 소스페소’이다. 밥을 먹은 군인뿐 아니라 소식을 접한 우리 모두의 정서를 보듬고 위로해준 고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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