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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사방에 병(病)이 있다 알록달록한 뚜껑들. 파랑뚜껑 빨강뚜껑 주황뚜껑 어느 병이 잡히나? 나무젓가락을 퉁겨 맥주병을 따던 여릿한 손목의 그녀처럼 통쾌하게, 내장이 줄줄 흐르는 꽃게 등딱지 따듯 조심스럽게, 병의 맛은 풍부하고 목이 탄다 꽉 찬 듯 모자란 용량의 말이 출렁이는 병들

 

언니가 갓 딴 병 앞에 앉아 있다 탄산 안개에 휘감긴 병, 언니는 병 주둥이가 안 보여 웃고 나는 병의 눈알이 안 보여 운다 운명은 병 하나 앞에 놓고 입과 눈을 멋대로 놀리는 것! 귀가 얇아진 이쪽 끝에서 코가 무뎌진 저쪽 끝, 숱한 병들이 손목 앞에서 깝죽거린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사방이 다 병(病)이다. 오랜만의 안부 가운데 새로운 병명을 알게 되거나 새로운 병원의 위치를 익히게 되는 일이 잦다. 그리고 어제는 두 통의 부고를 받았다. 병은 어째서 이토록 무자비한지. 그것이 병(甁)이라면 그 병을 훔쳐다 속에 든 것을 콸콸 다 쏟아버리고 싶다. 병을 던지고 싶다. 부수고 싶다. 손목 앞에서 자꾸만 깝죽거리는 숱한 병들.

시 속 ‘언니’는 지금 막 하나의 병을 얻었고, 언니와 ‘나’는 한껏 당혹스러운 상태로 갓 딴 병을 주시하고 있다. 낯선 시간을 앓고 있다. 병은 주둥이도 눈알도 모조리 감춘 채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과연 표독하고 무자비한 병. “운명은 병 하나 앞에 놓고 입과 눈을 멋대로 놀리는 것!” 시인은 탄식한다. 병은 기어코 운명을, 삶 전체를 원망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더 아픈 것이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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