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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실험적 가치 있는 작품 제작”… 영화계 ‘미다스의 손’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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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1-15 06:00:00 수정 : 2023-11-14 21: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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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산실 ‘명필름’ 심재명 대표

현재까지 45편 영화 제작
580만명 끌어모은 최고 히트작 ‘JSA’
한석규·전도연 주연 ‘접속’도 흥행몰이
공동제작 ‘싱글 인 서울’도 개봉 준비

명필름의 색깔로 새 도전
10년간 투자 못 받고 떠돌던 ‘건축학개론’
숙고 끝 제작 결심… 411만명 관객 동원
‘우생순’ 등 남들 꺼리는 소재·장르 개척

OTT 시대 ‘위기의 영화’
K콘텐츠 세계화 발판 불구 관객 감소
특정 영화 스크린 독점 구조도 우려 커
“관람료 조정, 공공·민간기관 투자 필요”

“199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를 우선적으로 보던 시절은 아니었어요. 한국영화는 뻔하고 할리우드 영화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는데, ‘접속’이 그 당시 문화적 경험을 향유하고 싶은 ‘엑스세대’(1970년대생)를 만족시켜줬던 것 같아요. 세련된 현대 도시남녀의 심리를 잘 건드린 거죠.”

 

1997년 개봉한 한석규·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은 전국에서 1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그해 최고 흥행영화 타이틀을 땄다. 당시는 관객 집계가 정확하지 않은 시절로 285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는 기록도 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30여년 영화계에 종사하며 수많은 히트작을 탄생시켰다. 지난 8일 서울 종로에서 만난 심 대표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며 가치가 있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한국영화가 침체에 빠진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적지 않은 숫자지만, 당시 극장 환경을 생각하면 엄청난 흥행 스코어다.

 

당시 전국의 개봉관은 500곳 안팎으로, 이듬해 11개 상영관을 갖춘 ‘CGV 강변11’이 문을 열기 전까지, 많아 봐야 극장 1곳당 3∼4개의 스크린이 있었고 대부분의 극장은 1개 스크린밖에 없는 ‘단관’이었다. 지난해 극장 수는 561곳으로 큰 변화가 없지만, 전체 스크린 수는 3322개로 6배 가까이(1999년 기준 588개) 늘었다. 이 영화가 그 당시 얼마나 큰 화제가 됐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접속’은 영화사 ‘명필름’의 작품이다. 1995년에 설립돼 3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해온 명필름은 이후로도 ‘해피엔드’(1999), ‘공동경비구역JSA’(2000·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마당을 나온 암탉’(2011), ‘건축학개론’(2012) 등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견인했다. 그리고 이런 명필름을 이끌어 온 건 창업자이자 제작자인 심재명 대표다.

 

심 대표를 지난 8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영화사 인사이트필름에서 만났다. 명필름은 인사이트필름, 디씨지플러스와 공동 제작한 ‘싱글 인 서울’의 개봉을 준비 중이다.

 

1988년 서울극장의 홍보담당으로 시작해 명필름의 전신인 ‘명기획’을 세우고, 이어 명필름까지 30년 이상 한 우물을 파온 심 대표의 인생을 반추해 보는 일은 그 자체로 한국 영화사를 돌이켜 보는 일이었다. 더불어 그와의 만남은 침체에 빠진 한국영화의 나아갈 길을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다.

 

◆JSA, 우려와 걱정 속에 탄생

 

심 대표는 지금까지 45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최고 히트작은 박찬욱 감독의 세 번째 장편작인 ‘JSA’이다. 2000년 개봉한 이 영화는 약 58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JSA는 당시 굉장히 낯설고 위험하다며 주변에서 많은 우려를 했던 소재와 주제의 영화였죠. 군사분계선에서 만나는 남북 군인의 얘기를 처음 다룬 작품인데, 돌이켜보면 저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다 분단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의식을 건드린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고,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들었고, 제작비도 그해 최고였던 대작이죠.”

 

이 영화의 흥행에는 운도 따랐다고 심 대표는 회고했다. ‘JSA’ 촬영 막바지인 1999년 6월 연평해전이 발발하며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고, 영화는 개봉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기적처럼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고, 이는 JSA 개봉의 호재였다.

 

‘운칠기삼’일까. 한국영화의 성장기 속에 영화 제작사를 운영한 것은 심 대표의 운이라면 운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꾸준히 작품을 만들어온 영화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건축학개론’, ‘우생순’ 등의 흥행 스토리를 듣다 보니, 명필름의 성공 뒤에는 항상 새로운 도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역시 성공은 그냥 오지 않는다.

 

◆새로운 도전이 부른 흥행

 

가수 ‘수지’를 국민여동생으로 각인시키며 뭇 남성들의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한 ‘건축학개론’은 심 대표가 아니었으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당시 건축학개론 시나리오가 10년 동안 투자받지 못하고 영화계를 떠돌았어요. 우연히 시나리오를 봤는데 아련하고 애틋하고 좋았지만, 상업영화로서 필요한 세고, 분명한 뭔가가 보이지 않아서 (흥행 성공이) 어렵겠다 생각했죠. 하지만 너무 마음을 흔드는 그런 지점이 있었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영화로 만들어 보자 결심을 하고 1년 정도 시나리오를 각색해서 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영화 산업이 성장세에 있었고, 투자를 받을 수 있었죠. 지금이라면 과연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시 기준으로 멜로물이라고 하기에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건축학개론’은 411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영화계 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핸드볼팀의 실화를 다룬 ‘우생순’이나 ‘마당을 나온 암탉’, ‘카트’(2014) 등의 영화도 남들이 만들지 않거나 만들길 꺼리는 소재나 장르였다.

 

“여자 스포츠선수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영화는 우생순이 처음이었을 거예요. 노동영화는 있었지만 비정규직 여성을 내세운 영화라는 점에서 ‘카트’는 새로운 시도였고, 위안부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운 ‘아이 캔 스피크’(2017)도 마찬가지였죠. ‘아이 캔 스피크’가 개봉할 당시 영화 포스터들을 보면,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던 극장의 홀대 속에 개봉 당시 대부분의 극장에서 오전 시간대에만 상영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220만명이라는 국산 애니메이션 중 최다 관객 기록을 세웠다.

 

이런 도전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영화가 심 대표가 말하는 ‘명필름’의 색깔이다.

 

“명필름 영화엔 판타지물, 조폭 영화, 남성적인 터치의 액션 영화는 없어요. 일부러 안 한 건 아니고 못한 거죠. 그 세계를 알지 못하니까요. 대부분 영화들이 리얼리즘, 휴머니즘, 멜로, 사회파 드라마 그런 것들이죠.”

 

◆“이제 더 어른스러운 얘기에 관심”

 

이전의 명필름 영화들이 사회상을 반영한 상업물이라면, 요즘 명필름의 영화 중엔 전태일 열사의 얘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태일이’(2021)처럼 정치성과 사회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젊었을 때, 그러니까 ‘접속’이나 ‘JSA’를 만들 때는 영화의 메인 타깃층인 20·30대와 제 나이가 별로 차이가 안 났어요. 지금은 30년 차이가 나는데, 트렌드를 좇거나 젊은 감각의 영화를 만드는 건 힘에 부치더라고요. 감각도 떨어지고, 경쟁력도 떨어지는 거 같고. 그러다 보니 더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되는 게 아닌가. 만들고 싶다. 만들 만하지 않나. 그런 변화가 있는 거죠.”

 

명필름 창립 전해에 결혼해 함께 명필름을 이끌어온 이은 대표의 색깔이 짙어진 듯도 하다. 추구하는 이상이나 사업 방식을 놓고 영화사를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게 어렵진 않을까.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부딪치는 건 없어요. 남편과는 능력과 성향이 달라요. 저는 직관적, 감성적이고 이은 대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죠. 저는 시나리오나 캐스팅 등 영화를 만드는 과정의 창의적인 측면에 집중한다면, 이 대표는 시스템을 갖추고 조직화하는 능력을 발휘하죠. 서로 다른 능력을 상호 보완하는 거예요. 초반에는 영화 성향이 달랐지만 지금은 그것도 닮아가는 거 같아요.”

 

다른 부부들처럼 사적인 관계에선 다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선 ‘운명공동체’라고 했다. 영화사가 망하면 부부가 다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귀띔이다.

 

◆“영화 위기의 시대, 필요한 건 다양성”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 대담한 도전을 번번이 성공시키며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던 그에게도 요즘 영화 환경은 녹록지 않다.

 

멀티플렉스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과거보다 훨씬 많은 콘텐츠가 생산되고 소비되며 한국 영화와 드라마 등 ‘케이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 진출할 발판을 얻었지만, 이는 극장 관객 감소라는 위기를 불렀다.

 

“정말 심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지금이 바닥이 아니라 더 바닥을 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일단 투자 심리가 많이 위축됐어요. 수익 악화가 계속 거듭되다 보니까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질 않고, 제작비는 상승했고, 올해 (한국영화가)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미국이나 프랑스는 팬데믹 이전으로 거의 회복됐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저는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가 처음 영화계에 발을 디뎠을 때는 ‘미스 심’이라고 불렸다. 극장에 여직원이 입사했다는 것 자체가 화제가 되던 시절이고 그만큼 남성 중심적인 영화계에서 쉽지 않은 길을 개척했지만,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힘든 시절인지도 모른다.

 

난관을 극복할 해법은 뭘까. 그 역시도 이에 대한 고민이 깊고, 명쾌한 해법을 내놓진 못한다. 그는 초심과 원론을 말했다.

 

“다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들을 만들어야 되는 거고, 건강한 영화 생태계가 이뤄져야 하는 거죠.”

 

영화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심 대표는 영화 관람료 조정과 공공·민간기관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봤다. 영화의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영화의 ‘다양성’이 살아나는 일이라고 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특정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하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로 들린다.

 

어렵고 힘들다고 그의 영화로운 여정이 여기서 멈추진 않는다. 명필름은 당장 박범수 연출, 이동욱·임수정 주연의 ‘싱글 인 서울’을 오는 29일 개봉한다.

 

“(현재 명필름이 위치한) 파주 출판도시의 공간을 알리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다루는 멜로 드라마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는데 잘 안 풀렸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싱글남’이라는 영화를 ‘디씨지플러스’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공동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죠.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 하나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편집자와 작가의 이야기예요. 젊은 연배분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만들고 있고, 코미디 감각 같은 것들이 기존에 명필름이 만들어 온 정통 멜로와는 좀 색깔이 다르죠.”

 

이밖에도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이 내년 1윌 개봉을 앞두고 있고, 명필름이 세운 영화학교인 명필름랩에서 만든 ‘해야할 일’도 영화를 완성해, 내년 개봉 예정이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된 ‘꼬마’도 제작한다. 2010년 서울대공원을 탈출한 반달가슴곰 ‘꼬마’가 모티브다.

 

“영화라는 게 자본의 선택을 받아야 하잖아요. 제작 역량이라든가 세상에 내놓고 싶은 이야기가 더 없을 때는 미련 없이 그만해야 되겠죠. (그렇지만) 도전적이고 실험적이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심재명 대표는… ●1963년 서울생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명필름 대표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한국영화 성평등센터 ‘든든’ 센터장 ●2000년 디렉터스 컷 올해의 제작자상 ●2011년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2012년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코르셋, 접속, 해피엔드, 섬, 공동경비구역JSA, 와이키키브라더스, YMCA야구단, 욕망, 몽정기2, 그때 그 사람들, 광식이 동생 광태, 극락도 살인사건,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소년은 울지 않는다, 파주, 시라노;연애조작단 ,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관능의 법칙, 카트, 화장, 노회찬 6411, 태일이 등 제작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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