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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문턱에 선 이방인 청년… 통념 깨며 ‘나’만의 세계 열다

입력 : 2023-11-14 20:40:36 수정 : 2023-11-14 20: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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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의 신작 ‘타국에서의 일 년’ 낸 소설가 이창래

세상에 소속감 못 느끼던 혼혈 ‘틸러’
싱글맘 ‘밸’·사업가 ‘퐁’과 관계하며
삶과 세계에 대한 고뇌·깨달음 얻어

1965년 서울 生 작가, 세 살 때 美 이민
이주 경험 살려 소외·정체성 등 다뤄
다수 문학상 수상… 노벨상 후보 거론도

어른의 이야기. 최초의 충동은 아무래도 젊은 영웅을 포함해 어른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이 영웅은 나이가 들수록 그가 중년 시절에 경험한 나이듦이나 죽음, 가족의 중요성 등의 관심과 걱정을 반영하는 어떤 시련들을 경험할 것이었다.

“원래는 작품 속 틸러의 멘토인 중국계 사업가 퐁에 초점을 맞춰 그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뀌어갔어요.”

해외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미국 소설가 이창래가 성인의 문턱에 선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부분적으로 제 어린 시절을 기초로 한 소설은 거의 완성된 듯하다”고 말했다. 작가 제공

소설가 이창래는 성인의 시작 지점에서 삶과 세상의 고뇌와 황홀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구현할 수 있는 영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퐁이 아닌, 퐁의 여정과 함께 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가는 청년 틸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가게 됐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본능적 질감과 리듬에 관한 이야기로서, ‘마음’에 관한 소설이자 신체에 관한 소설이 될 것이었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해외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미국 소설가 이창래가 성인의 문턱에 선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강동혁 옮김, 알에이치코리아·사진)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여섯 번째 작품으로, ‘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후 9년 만이다.

작품은 뉴저지 대학 도시 ‘던바’ 출신의 20대 청년 틸러 바드먼이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이행 중인 연상의 싱글맘 밸과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사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밸과 빅터 주니어에 대한 알 수 없는 위협을 물리치면서 묘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약간의 한국계 피가 흐르는 대학 중퇴생 틸러는 어머니가 가출하고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로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서 자신이 속한 현실과 세상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젊은이였다.

“나는 늘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어정정한 것들의 강에 담긴 것만 같았다. 그냥 괜찮음이라는 투명한 잉크가 내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일부 사람들은 즉시 그 점을 알아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결국 나에 대해 알고 나서 ‘아, 그렇군.’ 하는 표정을 잠시 짓는다. 보통 그 표정은 출구로 안내되는 전주곡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의 미각을 높이 평가하는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 퐁 로우에 이끌려 해외연수 대신 ‘낯선 세계’로 훌쩍 떠나게 된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퐁을 따라서 하와이, 중국 마카오, 선전으로. 퐁은 그를 위험한 인물의 손에 남겨놓은 채 떠나고, 틸러는 노예처럼 부려지다가 간신히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소설은 틸러가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밸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가는 이야기와, 퐁과 함께 나선 알 수 없는 여정을 교차하듯 전개시키면서 동서양을 종횡무진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서사를 펼쳐 보여준다.

“나는 나 자신을 그냥 그녀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퐁이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얘기할 때 한 말처럼, ‘신발 뒤축에 묻은 흙먼지’처럼 말이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재미 한국계 소설가 이창래가 그린 우리 시대 청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 작가를 최근 이메일 인터뷰로 만났다. 서툰 영어에 양해를.

―소설 집필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 작품의 가장 기괴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젊은 영웅 틸러가 거대하고 산업화된 돌절구로 태국식 카레를 만들도록 강요받는 장면과 관련이 있다. 많은 독자들은 그것이 제 상상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해했는데, 저의 작은 부엌 절구에서 그런 카레를 오랫동안 계속 만들어왔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저의 즐거움과 교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저는 그러한 활동이 틸러가 부유한 납치자로부터 존경을 얻고 그의 용기를 보여주기 위해 강요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틸러가 퐁을 따라서 해외에서 1년을 보내는 이야기와, 새 가족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를 교차해 전개해 나가는데.

“이 작품이 단지 ‘모험 소설’, 즉 틸러가 세상을 여행하면서 겪은 일을 따라가는 피카레스크 소설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저는 그가 최소한 일시적인 휴식을 찾은 조용한 가정을 중심으로 고통의 여파 이야기와 함께하는 활동적인 오락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 같은 고요와 안전은 환상이 될 수 있기에, 틸러는 신속하게 행동해 새 가족을 보호함으로써 사랑을 옹호해야 한다. 항상 모험 이야기를 읽는 것을 갈구하는 것이 이야기의 속성인데, 종종 내레이터가 정적인 장소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현실과 정신 두 측면 모두 위험한 장소에서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원했다.”

―와우, 그래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서사가 펼쳐지는데.

“사실 저의 모든 소설에서 동양과 서양의 혼합과 무질서에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번 소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저는 단순히 주인공을 온갖 지옥과 비참함 속에 몰아넣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을 인종적 혼합체로 만들어서, 서양인이 동양에 가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고전적 서사를 전복하고 심문하고 풍자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희망이란 정체성과 이야기, 자아에 대해 널리 알려진 개념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애정한 인물은 누구인가.

“틸러는 소설 내레이터이기 때문에 당연히 눈에 띄지만, 저는 야망도 크고 가슴도 따듯한 중국계 기업가 퐁을 가장 애정하는 듯하다. 물론 퐁에겐 결점도 있다. 하지만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맹렬하게 노력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 특히 이민자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명과 깨달음은 생각하기뿐만 아니라 물질성 및 존재에서 나온다는 것. 틸러와 퐁은,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든, 항상 경험의 가마솥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이창래는 1995년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국인 2세 이민자 이야기를 담은 장편 ‘영원한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펜·헤밍웨이상과 반스앤드노블 신인 작가상, 아메리칸 북어워드, QPB 뉴비전 문학상, 오리건 북어워드 등 6개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이민과 정체성, 소외, 아시아계 미국인의 복잡한 경험 등을 담아 ‘척하는 삶’, ‘가족’, ‘생존자’, ‘만조의 바다 위에서’ 등을 발표했다. 예일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오리건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2002년부터 프린스턴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지.

“제 소설쓰기의 유일한 방법은 작가, 예술가의 내면에 있는 리듬과 감정, 집착에 충실하는 것이다.”

―글쓰기나 일상의 루틴은 어떤지.

“매일 아침부터 점심까지 일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영감을 받았다면 조금 더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자전거를 타거나 요가를 하는 등 운동을 즐긴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수많은 ‘틸러’들이 있다.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지 여부와 상관없이, 시간의 명령으로 어른의 세계로 가야 하는. 고통을 즐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는. 삶의 어떤 최전선에 서 있는 세상의 모든 틸러들을 이창래는 응원하는지도. 파도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라고. 역사에 어떤 빚도 없이. 현실의 중력에도 벗어나서.

“나는 아무런 의욕이 없는 존재의 비밀스러운 기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바다에 붙어 조류에 휩쓸리는 단 하나의 조개였다. 고립됐다가 물에 잠겼다가 거친 파도에 두들겨 맞았다가를 번갈아 겪다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것이다. 상관없었다. 나는 온전히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았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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