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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대화의 서사 해부… 젠더화된 민족주의를 추적하다

입력 : 2023-11-10 22:10:00 수정 : 2023-11-11 15: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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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남성상 제시한 역사학자 신채호
지식인 남성의 나약함 그린 작가 이광수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사도 분석
무력 숭상부터 강인한 정신력까지 변천
한 시대의 의식 흐름 집약적으로 보여줘

애국의 계보학/실마 미요시 야거/조고은 옮김/나무연필/2만원

 

“어떻게 새 국민을 만들어야 할까? 강건하고 용진하는 국민을 만들어야 한다. 왜 그런가? 칼산 칼물이 도처에 종횡하고 백 가지 괴물과 천 가지 마귀가 곳곳에 가득한 이 시대에 강건한 국민이 아니면 저것에 맞서기 어려우며, 용진하는 국민이 아니면 저것과 싸우지 못할지니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영웅 중심의 민족주의 서사 전략을 채택한 역사학자 신채호의 1909년 6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칼럼이다. 젊은 신채호는 조선 양반의 문약함을 지적한 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장군, 고려의 최영 장군, 조선의 이순신 장군 등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나약한 양반의 대척점으로 강한 군사적 남성상을 제시했다.

개화기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정체성 또는 민족주의 서사의 계보를 추적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책은 신채호와 이광수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1980년대 학생운동권, 전쟁기념관을 거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담화 속에 담겨 있는 민족주의 서사를 탐구한다. 사진은 신채호, 이광수, 박정희, 서울대생 박종철, 김대중. 세계일보 자료사진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당대의 지식인들은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한 ‘조선’을 딛고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에 문제가 있어서 일제 식민지가 됐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 최초 근대소설을 쓴 작가로 알려진 이광수는 근대문학 실천과 국가 건설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친일 지식인이었다. 특히 식민지 시대 나약한 지식인 남성 모습을 재현하는 한편,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에 앞장서는 여성상을 형상화하려 했다. 1917년 발표된 작품 ‘무정’의 주인공 형식은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자살하려는 약혼자 영채를 외면하고 신여성 선형과 유학을 꿈꾼 인물이었다.

실마 미요시 야거/조고은 옮김/나무연필/2만원

“영채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가 죽고 산 것도 알아보지 아니하고, 뛰어와서 그 이튿날 새로 약혼을 하고, 그 뒤로는 영채는 잊어버리고 지내온 자기는 마치 큰죄를 범한 것 같다. 형식은 과연 무정하였다.”

반면, 기생으로 살아가던 영채는 신여성 병욱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뒤 새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사적 사랑을 애국으로 환치시키는 지점이다.

젊은 시절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인으로 알려져 화제가 된 미국 오벌린대 동아시아학 교수인 저자는 책에서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 시대까지 대한민국 정체성 또는 민족주의 서사의 계보를 추적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발터 벤야민의 ‘몽타주 이론’을 채용, 일제강점기의 신채호와 이광수부터 해방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1980년대 학생운동권, 전쟁기념관을 거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텍스트나 담화 속에 담겨 있는 민족주의 서사, 한국 근현대사의 내적 논리를 탐색한다.

해방 이후 국가 정체성 서사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과 군사정권에 맞선 1980년대 학생운동권, 1994년 설립된 전쟁기념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뒤, 영웅적인 남성성 서사가 박정희 대통령과 1980년대 학생 운동권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변주된다고 분석한다.

“신라 때부터 전승된 꿋꿋한 호국 민족정신인 국선 ‘화랑도’의 지행합일의 지도자상을 무너뜨리고 문약에 빠져 광개토왕의 웅대한 고구려적 웅위는 사라지고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을 받은 것이 이조이다…. 그 화랑도의 이조적 중흥이 이 충무공의 찬란한 호국 행적이다.”(1962년,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저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력적으로 추진한 새마을운동에서도 군사적인 남성성이 극적으로 드러난다고 분석한다.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신채호와 대척점에 서 있지만, 이순신을 비롯해 군사적 남성성을 강조하는 서사 전략은 닮아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주장한 1980년대 학생 운동권도 유약한 남성성, 군부독재의 잘못된 아버지를 넘어서려 했으면서도 민족사와 가족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조함으로써 가부장적, 효성을 다하는 아들 상을 제시했다고 분석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성성은 과거 한국이 경유해온 남성상의 계보와 다르다고 분석한다. 즉, 이전의 남성상이 무력을 숭상하는 군사적 남성상(신채호, 박정희 등)이나 무력한 남성상(이광수 등)이었다면, 김대중의 남성상은 기독교적 용서에 기반한 정신적으로 강인한 남성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국민 외에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올바른 사람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서야말로 최대 승리라는 철학과 신념을 가진 자만이 자신 있게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87년 여름 샤머니즘을 연구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가 6월 항쟁을 목도한 뒤 자신의 연구방향을 선회, 인류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한국 학생운동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논문은 이 책의 원형이었다.

“전혀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가진 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동일한 서사를 활용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학생운동 세력과 국가 민족주의자들은 각기 자신의 정통성을 표명하기 위해 특정한 주장을 펴면서 매우 유사한 수사 표현을 재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책은 한국 근현대사 서사를 이해하는 데 독창적인 시각을 제공해주지만, 총체성이나 정확성 측면에서 다소 아쉽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화 과제와 함께 식민지배 청산, 해방 이후에도 근대화와 함께 민주주의라는 이중 과제 속에 있었던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거나,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을 북한 김일성에 소구된 것으로 쉽게 단정한 점 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서사를 남성성 비판, 젠더의 문제로 단순화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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