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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감기는 목덜미로 온다더라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플라타너스 아래 낮 한 시 반쯤 옷깃을 세워주며 네가 말해주었는데 기억한다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보다 느리고 봄만큼 짧게 영상의 기온인데 감기라니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네가 말했지 사랑해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도 미래는 오가는 것들을 잠시 세우고 죽은 듯 조용할 거였고 그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거였고 때 아닌 재채기 같은 마른가지 하나가 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너 대신 내가 올려다본 공중에는 가늘게 쪼개진 빛이 동그란 거처를 만들어 그늘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정말 그런 사이가 된 것처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다정이란 얼마나 강력한지, 때로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다. 무른 마음은 금세 투항하고 만다. 한낮 영상의 기온에도 “감기는 목덜미로 온다더라” 말하며 옷깃을 세워 주는 사람.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깃든 온기. 이런 것을 조심할 것. 함부로 사랑해 버리면 곤란하므로. 다정한 그가 “사랑해” 말해주지 않으면 더욱 곤란하므로.

어쨌거나 이 시는 감기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사랑에 이르는 순간의 동그란 빛이 선연하다. “재채기 같은 마른가지 하나”가 한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그 대신 내가 환한 공중을 올려다보는 순간. 불현듯 열병을 앓듯 요동하게 될 마음. 이 아름다운 병증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될 마음. 깔깔대며 한참을 웃고 난 뒤에도 고스란할 기억.

다정이란 얼마나 강력한지, 그 자취는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디 조심할 것. 다정도, 감기도.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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