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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쓴 ‘동방견문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기다. 유럽인에게 동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탐험 욕구를 자극하고 동서양 문화 교류를 촉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격적인 인쇄술이 발달하기 200년 전인데 이탈리아어로 쓰인 책이 어떻게 유럽 대중의 인기를 끌었을까. 필경사들 덕분이다. 여러 필경사들이 원본을 손으로 베끼거나 번역해 유럽 전역에 보급했다. 필경사들 창작이 더해지면서 여행기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책이 귀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두루 소장한 양반가가 드물었다. 선비들은 책을 빌려서 직접 베끼거나 필경사를 고용해 필사하도록 했다. 한정된 수량이니 책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 조사에 따르면 중종 때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 같은 책은 보통 품질의 무명 면직물 서너필을 줘야 살 수 있었는데, 쌀로 치면 21∼27말에 해당한다. 논 2∼3마지기에서 산출되는 양이니 너무나도 비싼 책값이다. 요즘 책이 넘쳐나는 시대에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책은 정보기술(IT) 발달로 천덕꾸러기 신세다.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켜면 온갖 정보에 접근하니 책이 팔리지 않는다. 전통 있는 출판사와 서점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 다만 정치인에게는 책이 여전히 좋은 양식이다.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다. 출판기념회를 열어 정치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자화자찬성 책을 내는 정치인이 수두룩하다. 어느 정치인은 집안에서 발견된 3억원에 대해 “출판기념회에서 모은 후원금”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 직전 윤석열 대통령의 부산저축은행 무마 의혹을 제기하는 인터뷰를 대장동 의혹의 김만배씨와 한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김씨한테서 1억65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신씨는 우리나라 고위층 혼맥을 다룬 자신의 책 세 권을 부가가치세 1500만원까지 포함해 판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책 한 권이 5500만원이라는 건데, 지금이 조선시대라도 된다는 말인가. 정치인들의 ‘수금잔치’ 행태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의도에서 한 인터뷰라면 더더욱 그렇다.


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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