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정권 참여 인물 등 건국장 취소 검토
친일행적 회개 독립운동가엔 서훈 자격
“유공자 범위 제한 땐 독립운동 왜소화
정권 성격 무관 객관적 기준 필요” 지적
박민식 “5·18 유공자 심사권한 이관을”
민주당 입장표명 없어 일단 관망 모드
국가보훈부가 친북뿐 아니라 해방이 되기도 전에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 심사기준 재검토를 시사하면서 보훈을 둘러싼 이념 전쟁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유공자 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하면 독립운동을 왜소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 진보 등 정권 성격과 무관하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 정립이 필요해 보인다.
2일 보훈부에 따르면 정부는 친북 논란이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기준 및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기준을 마련한 뒤 논란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서훈의 적절성을 검토할 예정이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해 친북 논란이 있는 인물 내지 공산주의 국가 건립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한 인물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할 수 있는지 여부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면 현재 기준으로도 서훈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 좌익활동으로 여겨지는 노동운동·무장투쟁을 한 인물들도 서훈이 재검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역대 정부들이 넓혀온 독립유공자 기준을 다시 좁히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역대 정부들은 사회주의 운동도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봐 기준을 확대해 왔다. 보훈부의 전신인 국가보훈처도 광복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훈을 줄 수 있게끔 기준을 개정했다. 의열단을 이끈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으나 조선공산당의 핵심 일원이었던 김철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한 김산(장지락),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이동휘 등 주요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들은 포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한반도 분단을 가정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본 셈이다.
이날 보훈부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재검토하는 이유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맞춰 기준을 재정립하자는 차원”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자의적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축소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역사학)는 “국민 눈높이라고 하지만 현 집권세력의 이념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것 같다”며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노동자·농민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이 독립운동으로도 효과적이었고 이런 시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남과 북이 갈라진 이후 상황에서 소급하여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다양한 독립운동을 조명하려는 학계의 움직임과도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김일성을 제외한 다른 독립운동을 배제한 북한과 달리 독립운동을 폭넓게 인정하고 기려야 정통성 측면에서 우리가 우위에 서게 된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죽산 조봉암(1898∼1959)의 경우 서훈의 길이 열렸다. 보훈부는 한때 친일 활동을 했더라도 이후 회개해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 기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 개혁을 이끌었던 조봉암의 경우 유족들이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정부에 세 차례 요청했지만 보훈처는 사회주의가 아닌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유족의 요청을 반려해 왔다.
같은 기준으로 구한말 문신이자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서훈도 재검토될 가능성이 크다. 김가진은 사망 후 장례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나 100년이 지나도록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고 서훈도 시행되지 않고 있다. 보훈부는 특별분과위원회를 신설해 이들에 대한 재평가 및 심사 업무를 맡길 예정이다.

한편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날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에 대한 심사 등 권한을 보훈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5·18 보상법이 되면서 그 보상 심사를 그 당시에 광주광역시에서 하게 됐다”며 “5·18이 지난 지는 벌써 40년이 넘었지 않았나. 그렇다면 지금은 국가보훈부로 이관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5·18을 폄훼하려는 주장들과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5·18 가짜 유공자 논란을 고려할 때 보훈부가 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5·18은 국가 기념일이고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닌 대한민국 전 국민의 것”이라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와 관련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진 않았지만, 당분간 보훈부 움직임을 지켜볼 전망이다. 한 당 지도부 관계자는 “그동안 유공자 명단 공개 등을 요구한 전례를 봤을 때 총선을 앞두고 여권에서 이념 공세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경계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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