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스스로 판단을 내리길 바라네. 나는 자네를 적극 지원할 것이고 완전히 신뢰하네.”(138쪽)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사령부가 있는 도쿄 다이이치빌딩에서 새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에게 중공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이같이 말했다. 정오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출발, 오후 4시 대구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그는 미8군 사령관의 임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매슈 B. 리지웨이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순간이었다.

나흘 전 저녁, 리지웨이는 친구의 집에서 식사 뒤 하이볼 한잔을 마시면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친구가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장군이 전화로 그를 찾는다고 전했다. 육군참모총장이 전한 소식은 그의 일상적인 저녁을 한순간에 바꾸었다.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이 그날 의정부 북쪽에서 지프차로 이동하던 중 한국군 6사단 트럭과 충돌해 사망했고, 그가 후임으로 미8군을 지휘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한국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은 한발의 총성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나는 곧바로 보고해야 했고 준비할 시간이나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134쪽)
리지웨이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뛰어든 1950년 12월26일은 중국 지원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 후퇴를 거듭하던 시기였다. 한국군은 보슬비가 내리던 1950년 6월25일 새벽 강력한 포격과 함께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내려온 북한군에 밀려서 낙동강까지 쫓겼다가, 9월15일 유엔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국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급기야 1951년 1월4일 서울을 다시 내줘야 했다. 이때 미군과 국군, 유엔군 모두 사기가 뚝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용감해 부여된 어떤 임무라도 수행할 각오가 돼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불안해하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감에 차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군대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열정과 기민함, 활력이 부족했다.”(143쪽)

리지웨이는 우선 미군과 유엔군, 국군을 추슬러 전투의지를 회복시키는 한편 공세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전투의지의 회복, 부대에 대한 자긍심, 리더십에 대한 신뢰, 임무에 대한 신념을 가지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그는 지휘관들에게 강한 어조로 반복했다. “적을 찾아라! 고착시켜라! 싸워라! 해치워라!” 1월21일에는 전 장병에게 지휘서신을 내려 보냈다.
“단순히 한국의 도시나 마을 이곳저곳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영토의 문제는 부수적인 사안입니다⋯ 이것은 명예롭고 독립적인 국가에 사는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치른 희생과 앞으로도 치러야 할 희생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직접 지키기 위한 행동입니다. 결국 이곳 한국에서 발생한 문제의 본질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우리가 이곳에서 보았던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출을 중단시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먼 미래 언젠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145쪽)
리지웨이는 적들에 비해서 아군의 수적인 열세를 미군의 강점인 화력의 우세로 극복하기 위해서 아군 부대간 긴밀한 연계와 협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1951년 1월25일, 미군과 유엔군, 국군은 신중한 반격을 시작했다. 2월 원주 북서쪽에 위치한 지평리 지역에서 중공군 5개 사단의 공세를 격파하면서 승기를 잡았고, 3월14일 서울을 다시 회복한 뒤 진격을 이어갔다.
중공군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황이 분명해지자, 그는 아군 부대간 연계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공군의 공세를 대비했다. 이후 전선은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게 됐다.

4월, 유엔군 사령관이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서 전격 해임됐다. 리지웨이는 맥아더에 이어서 유엔군 사령관에 올랐고, 그의 후임에는 제임스 밴 플리트가 부임했다. 그는 맥아더의 해임과 관련, “반역적인 패거리의 음모”나 “맥아더 장군이 아시아 대륙의 전면전으로 미국을 밀어 넣으려 한다”의 비난, “두 사람 간 성격 차” 등의 분석 모두 근거 없고 명령불복종에 대한 단순한 해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진짜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전쟁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간의 극심한 견해 차이도 아니었고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아니었다. 마셜 장군이 상원 위원회의 증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저 대통령이 가장 분명한 용어로 반복적으로 전달한 정책에 대해 한 명의 지역 전구 사령관이 공개적으로 이의를 표명했기 때문이다.”(198쪽)
리지웨이는 밴 플리트에게 최대한 전술 지휘권을 부여하면서도 전술계획 승인권을 통해 전쟁이 더 이상 확전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제한전으로 적절하게 관리해 나가는 한편, 막오른 휴전협정을 끈질기게 이어가면서 전쟁을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최근 번역 출간된 『리지웨이의 한국전쟁』(박권영 옮김, 플래닛미디어)은 매슈 B. 리지웨이 장군이 쓴 한국전쟁 회고록이다. 책에는 미국이 내부적으로 출구전략을 고심하고 있을 때 어떠한 모습과 자세, 전략으로 미8군을 이끌었고 유엔군을 지도했는지를 적고 있다. 책은 1967년 미국에서 출판됐고,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번역됐다.
저자는 한국전쟁 발발부터 정전 협정까지 전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애치슨 선언의 전말, 첫 전투를 벌이며 본진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준 스미스특임부대, 맥아더의 천재적인 지략이 빛난 인천상륙작전, 북진하며 전력을 분산한 맥아더의 뼈아픈 패착, 맥아더와 그 부하였던 워커 장군의 불화, 전선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렸던 중공군의 나팔 소리,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과 치열한 고지전, 정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판문점의 모습⋯.
저자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미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에도 상당 부분 잘못 이해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했다”며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리지웨이가 한국전쟁에서 깨달은 교훈들은 무엇일까.

“한국전쟁의 큰 실책 중 하나는 전략을 세울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적의 능력에 치중하지 않고 적의 의도만 읽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과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중공군이 신속하게 위협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공군의 개입 위협을 과소평가했다.”(330쪽) 현실을 외면한 공허한 슬로건 문제도 지적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피해야 했던 한 가지 실수는 평화를 논의하기 전에 ‘완전한 승리’나 ‘무조건 항복’ 또는 ‘침략행위의 중단’을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 공공의 공간과 언론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슬로건들을 보면서 나는 모든 국민이 과연 제한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한전은 단순히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은 소규모 전쟁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제한전이란 국가이익과 현재 군사적 능력을 고려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제한하는 전쟁이다.”(332쪽) 그의 분석은 이어진다. “우리는 군사적 목표를 설정할 때 무엇보다도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의 대부분이 군사적 방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조롱하고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에서는 반드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적 노력을 결합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333쪽)
한국전쟁의 주요 작전이나 전투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의 주요 변곡점, 미국과 미군의 내부 움직임 등 한국전쟁 전반을 거시적 측면에서 조망하게 해준다. 한국전쟁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원제는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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