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대선서 승리 뒤 반대파 탄압
정치범 등 1만여명 초법적 살인 자행
美, 각종 제재로 석유 산업 옥죄기 추진
압박 통해 정권 붕괴 노렸지만 실패
페루·콜롬비아 등과 외교 관계 복원
룰라 재집권 후 주변국과 결집 강화
우크라전·美 제재 완화로 경제 회복
2024년 베네수엘라 대선 결과에 이목
부정선거와 인권유린 의혹 등으로 수년간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니콜라스 마두로(61)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외교 무대에 복귀했다.
그는 지난달 말 브라질에서 열린 남미정상회의(UNASUR) 참석을 시작으로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공식 방문, 이란 대통령 초청 정상회담 등을 이어가며 보폭을 넓히는 중이다.
특히 전임 자이르 보우소나루 행정부 시절 단절됐던 베네수엘라와의 외교 관계를 4년 만에 복원하고 마두로를 초청한 ‘남미 좌파의 대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이것은 마두로 귀환의 시작”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마두로는 경제 분야 전반에 걸쳐 받은 900여건의 제재, 암살 및 군사행동 위협 등을 언급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보다 더 잔인한” 미국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두로 정권이 국내 정치·경제적 위기와 국제적 압박 등으로 벼랑 끝에 몰려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던 서방의 계산이 착오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고립 버틴 마두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생전 후계자로 낙점한 마두로는 2013년 대선에서 50.6%를 득표해 1.5%포인트 차 근소한 승리를 거둔 뒤 반대파를 탄압하며 점점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2018년에는 야권 유력 후보들을 가택연금·수감 등으로 출마를 못하게 막고, 대선 날짜를 7개월 앞당기는 꼼수를 부려 재집권에 성공했다. 득표율은 67.8%로 높았지만, 야권이 선거 자체를 보이콧한 반쪽 선거였고 투표율도 46.1%로 역대 최저였다. 이듬해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대선 결과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임시 대통령’임을 자임했고 미국 등이 과이도 손을 들어주면서 ‘한 지붕 두 대통령’ 사태가 빚어졌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마두로 정권 붕괴를 위한 ‘최대 압박’ 작전을 전개했다. 군사개입 가능성을 흘리는가 하면 각종 제재로 베네수엘라 돈줄인 석유 산업을 옥죄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계좌 동결 등으로만 연간 11억달러(약 14조원) 수입원을 끊는 효과가 있었다.
2018년 대선을 ‘독재자에 의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마두로 때리기에 가세한 나라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으로 확산했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관계를 단절한 나라가 멕시코뿐이었을 만큼 서방의 개입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공통분모’로 유대 관계를 다져온 중남미 이웃국가들의 외면은 마두로에게 뼈아픈 일격이었다.
인도주의적 위기는 마두로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을 키웠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따르면 2016∼2019년 베네수엘라 군경은 정치범 등 약 1만9000명에 대해 초법적 살인을 자행했고 투옥, 고문이 속출했다.
마두로 집권 10년간 국내총생산(GDP)은 75%나 쪼그라들었다. 한때 연 100만%를 웃돈 초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 월 50% 이상)이 지속됐고 단전, 식량·의약품 부족 현상이 일상화했다. 베네수엘라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700만명이 2015년 이후 나라를 떠났다.
마두로는 고립 타개를 위해 이란, 튀르키예, 러시아 등 자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제재를 받는 국가들과 손잡았다. 휘발유·경유 자체 생산에 어려움을 겪는 베네수엘라는 이란으로부터 정유 공장 수리 등의 도움을 받았다. 또 러시아 중개자를 통해 제재를 회피해가며 인도, 중국 등에 원유를 수출했다. 아울러 불법 금 채굴, 코카인 환적 등을 통해 국고를 채워나간 것으로 미국은 보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마두로의 반인륜 범죄 조사에 착수했고, 미국은 2020년 마두로를 마약테러 혐의로 기소하고 1500만달러(약 191억원) 현상금까지 걸었다.

◆핑크 타이드와 룰라의 야심
2019년 말부터 중남미에 속속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제2차 핑크 타이드(분홍 물결)로 마두로는 점차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루이스 아르세 볼리비아 대통령이 2020년 11월 취임식에 과이도 대신 마두로를 초청하며 물꼬를 텄고, 2021년 당선된 페드로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은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2022년 콜롬비아의 사상 첫 좌파 대통령인 구스타보 페트로는 베네수엘라와의 국경을 재개방하고 자국 내에 기반을 둔 베네수엘라 국영기업의 경영권을 돌려줬다. 아르헨티나, 멕시코, 볼리비아는 베네수엘라 위기 해법 모색을 위해 2017년 미주 국가들이 결성한 ‘리마그룹’에서 이탈했다.

룰라의 재집권은 이런 분위기에 정점을 찍었다. 올해 1월 취임하자마자 외교 관계를 복원한 그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UNASUR에서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상황과 관련해 “불공정한 내러티브가 구축돼 있다”며 “우리의 반대자들은 베네수엘라에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좌파 정부에 대한 동지애라는 이데올로기적 동기, 아마존 난개발과 베네수엘라 이주민 유입을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글로벌 피스메이커’가 되고자 하는 룰라의 열망이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클럽’ 창설을 제안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는 룰라가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이행의 중재자 역할에도 관심이 크다는 설명이다.
룰라는 특히 마두로 복귀무대가 된 UNASUR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1차 핑크 타이드가 정점에 달했던 2008년 룰라와 차베스 주도로 남미 12개국이 모두 참여한 UNASUR는 역내 국경을 초월한 인프라 구축, 공동 질병 감시 등의 기반이 됐다.
UNASUR는 룰라의 퇴진, 차베스의 사망, 각국 우파 정부의 등장 등으로 결속력이 약해졌다가 이번에 9년 만에 다시 열렸다. 룰라는 이념 대립을 끝내고 함께 행동하자며 ‘수르’(Sur)라는 이름의 공동화폐 도입을 제안하는 등 유럽연합(EU)처럼 통합된 남미를 주창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과 제재 완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치솟은 유가는 세계에서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베네수엘라엔 기회가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한에 그랬던 것처럼 최대압박에서 ‘관여’(engagement)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분위기이다. 미·베네수엘라 양국 수감자 맞교환이 시작됐고, 마두로는 야권과 협의를 통해 서방에 동결된 자금 중 30억달러(4조원)를 국내 빈곤 문제 해결 등에 쓰기로 했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제재 일부를 완화해 석유회사 셰브런의 베네수엘라 석유 채굴 재개를 허가했다. 베네수엘라 민주화, 인도적 위기 해결이라는 명분과 유가 안정이라는 실리를 모두 챙긴 셈이었다. 2000년부터 베네수엘라에 의사와 교사를 보내주는 대가로 석유를 받아왔던 쿠바가 최근 연료난으로 노동절 행사마저 취소하자 영국 가디언은 “베네수엘라의 고품질 원유가 이제 미국으로 가는 것 같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경제도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은 베네수엘라 GDP가 지난해 8% 성장했으며 올해엔 5%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싱크탱크 ‘미주간대화’의 태머라 태러시우크 브로너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마두로가 변할 의사가 없는 만큼 이제는 관여가 중요해졌다”며 “마두로 정권이 민주적 절차로 향해갈 인센티브를 적절히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민주화는?
베네수엘라는 내년 대선을 치른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룰라 등 이웃 좌파 지도자들의 중재와 미국의 관여가 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이어지는 것이다. 미 학술지 민주주의저널은 “마두로는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내부 단속에만 전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웠을 수 있다”며 “베네수엘라와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수입원과 외교채널이 생겨남에 따라 마두로는 골치 아픈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마두로가 12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을 초청해 환대하자 야권에서 “국제 테러를 지원하고 여성을 경멸하는 전제국가의 수장을 받아들이다니 부끄럽다”는 성토가 나오는 등 외교관계에서 야권의 공략 지점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공정성을 잃은 대선이 또다시 치러지고 인접국 정상들은 선거 결과를 그대로 인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도 있다. 인도주의 위기 해결에 쓰기로 한 30억달러는 아직 집행되지 않고 있고,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한 예비선거를 공권력이 얼마나 지원할지도 불투명하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미주 프로그램 책임자 라이언 버그는 “마두로에겐 야당과 마주 앉아 선거 조건을 협상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다”며 “이제 (남미)지역이 그의 주변으로 결집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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