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작가들 ‘생명' 프로젝트
옛 숙박업소 창작 전시공간으로
방치된 소품도 설치예술 재탄생
설악산은 남한의 산 중에서 가장 명산이다. 그래서 산악인이 아니어도 평생 몇 번씩은 찾게 된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북양양IC를 빠져나와 서쪽으로 8㎞ 남짓 가면 설악동이 나온다. 이곳은 설악산 관광의 중심지로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학여행단의 단골 지역이었다. 이곳 숙소들은 30명도 족히 들어갈 큰 방도 있어서 밤늦게까지 들떠 있던 아이들이 모둠모둠 모여서 키득대며 추억을 쌓던 곳이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그 장소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매우 다르다. 그때의 숙소들은 폐가가 되어 방치된 지 오래다.
수학여행단 유치가 어려워지고 여행객 발길도 뜸해진 이곳은 희미한 간판만 남은 폐건물들이 즐비하다. 시멘트 마당은 곳곳에 갈라져 초록 풀들이 터진 물처럼 솟아나오고 노란 씀바귀가 빳빳하게 피어 있다. 학생들의 오락 장소가 되었던 ‘설악의 밤’이라는 작은 무대엔 부러진 의자 몇 개만 남아 있다.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은 깨지고 눌러앉아 제 이름을 포기한 풀들끼리 서로 엉겨붙어 황폐한 모습이다.
그러나 자연과 사람을 다시 엮는 힘은 역시 예술에 있다. 설악의 힘찬 기운을 받아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미술가들이 시도했다. 한국현대미술 작가 모임인 ‘NAH(Nature, Art, Human) 작가회의’가 ‘재탄생’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현대미술 프로젝트를 이곳에서 진행 중이다. 설악동 27-17번지 소재 숙박업소였던 옛 하늘정원이 ‘대안공간 NAH 설악’으로 새로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담쟁이넝쿨이 시퍼렇게 줄지어 날아다니고 포플라잎이 파닥이며 환영한다.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환대하는 첫 마당에서는 이호영 작가의 설치작품을 만나게 된다. 옛 정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푸른 매트리스는 가까운 속초 바다를 조각조각 오려온 듯한데, 그 옆에 자유롭게 배치된 붉은 의자 위에는 과거와 현재가 멀찍이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시간을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건물 3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작고 푸른 풀장들 같아서 인간이라는 옷을 탈의하고 그곳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기도 하다가, 갑자기 이것이 하늘로 솟구쳐 동해 쪽으로 날아가는 푸른 양탄자가 될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게 된다. 붉고 푸른 색깔의 대비는 우주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의 조화를 생각하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폐가에서 오래 방치된 매트리스와 의자가 설치미술의 오브제로 재탄생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찢어진 벽지가 그대로 액자 안으로 들어가 그림이 되고, 솜이 터져 나온 베개들이 창틀에 꽂혀 작품이 되었다. 오래 방치된 변기도 조명을 받으며 창의적인 설치작품으로 재탄생했고, 다리가 절뚝거리는 낡은 화장대도 과거를 거쳐온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는 마법의 거울이 되었다. 평면TV가 상용화되기 전에 사용되었던 브라운관을 쌓아 올려서 폐기물에 대한 관점을 바꿔 놓았다.
폐허를 미술관으로 만든 세계적인 사례는 많다. 2차대전 때 폭격으로 일부 벽체만 남은 독일 쾰른시의 성당을 60여년 후 콜룸바 미술관으로 변화시켰다. 옛 성당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면서 거기에 조화롭게 새 미술관을 건축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도 도시의 흉물이었던 폐 화력발전소를 20년 만에 리모델링해서 세계적인 명소로 바꿔 놓았다. 이런 세계적인 미술관이 공간의 재활용에서 탄생했기에, 우리 현대미술가들의 진취적 도전인 설악동의 대안공간은 참 반가운 일이다.
박용일 작가의 ‘He-story, 空든탑’은 알루미늄 폐방충망을 뭉치고 그 안을 비워서 색색의 빛을 쏘아 만든 탑이다. 인간의 건축 역사에서 공을 들인다는 것과 空(비어있음)이 든다는 것은 결국 동의어다. 아무리 공든 것도 마땅히 비워야 할 순간이 온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엔 사람이 있고 역사가 있지만 사람도 역사도 언젠가 비워질 것을 예측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건축물은 폐허가 전제다. 이 전제를 뒤집은 폐허의 재탄생이 바로 미술가들의 신선한 프로젝트인 ‘설악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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