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강릉에 커다란 산불이 났습니다. 저로서는 관심이 큰 지역이어서 하루 종일 뉴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 바로 옆에서 발화해 살았던 곳 부근까지 번졌기 때문이지요. 잡힐 것 같지 않던 산불은 오후 늦게 20여분간의 세찬 소나기로 비로소 수명을 다했습니다. 며칠 후 들러본 피해지역은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수십 년 된 소나무가 까맣게 타버린 것은 물론 펜션이나 민가에도 매우 큰 피해를 남겼더군요.
지인들에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다행히도 지인들 중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물으셨습니다. “집 근처에 불이 나면 댁의 사모님은 제일 먼저 뭐를 챙길 것 같아요?” 한참의 망설임 끝에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글쎄요. 저를 먼저 챙기지 않을까요?” 확신은 없었지만, 기대라도 가지고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고른 답이지요. 제가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사모님은 무엇을 제일 먼저 챙기셨기에 그러세요?” 그러자 그분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시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글쎄, 제가 다음 날 출근할 때 입을 옷과 가져갈 서류를 제일 먼저 차에 싣더라고요. 하하하.” 인생을 칠십년 가까이 사신 분이니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답이었지요.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부부 둘만 사는 집에서 이사를 가게 되는 상황과 관련한 우스갯소리가 한때 유행했습니다. 부인이 이사 가면서 챙겨가는 세 가지에 대한 이야기지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반려동물, 골프채, 친구들 연락처가 들어있는 휴대전화라고 하더군요. 세 가지 중에 남편은 빠져 있고, 남편이 없어도 없는 줄을 모른다는 웃지 못할 농담입니다.
나이가 쉰이 넘어가면서 이런 말을 제법 자주 듣습니다. “요즘 누가 사랑으로 살아. 의리로 사는 거지.” 그럴 때마다 저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정색을 하곤 하지요. 물론 의리도 사랑의 일종이지만, 그래도 역시 진짜 사랑과는 다른 겁니다. 여러분과 저 같은 을(乙)이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가장 좋은 무기는 역시 사랑입니다. 의리로 산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고백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에 힘이 생겨 사랑도 더 커지는 거지요. 부모님께,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한번 고백해 보세요. “사랑해요”라고. 그 순간 세상을 사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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