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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기후변화 문화재마저 위협 [연중기획-지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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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4-13 06:00:00 수정 : 2023-04-12 21: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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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태풍·산불 등 재해 따른 피해
2017년 22건→2022년 154건 급증

기후위기 일깨운 힌남노
비바람에 토사 뒤덮인 굴불사지석불상
접근금지 띠 둘러싸여 당시 참상 대변
서악동 고분군도 흙더미 속살 드러내

건축문화재 30년 후 강수노출 6배
강수강도 20㎜ 이상 비율 22.7% 증가
목조문화재도 1.2%서 17.8%로 늘어나
폭염일수는 20일 이상 비중 30% 육박

기후변화 최상위계획 누락
법사위서 국가유산기본법안 심사 진행
문화재청 ‘기후변화 대응안’ 초안 작성
“구체적 노력 위해 예산·인력 확보 시급”

“작년에 태풍 오고 얼마간만 해도 흙이랑 주변 시설물이 덮쳐서 여기 기도를 올릴 수도 없었지.”

지난 5일 경북 경주시 동천동 굴불사지석불상 근처에서 만난 정호경(69)씨는 기자에게 “이 정도면 정리가 된 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인근 백률사에 가기 위해 산을 오르던 중 굴불사지석불상에 기도를 올린 터였다. 굴불사지석불상 주위로는 노란색 접근금지 표시판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 뒤 경사면에는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었다. 모두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의 흔적이었다. 힌남노가 경주를 할퀸 그날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쏟아진 토사가 굴불사지석불상을 덮쳤다. 경주시 관계자는 “현재 복원을 위한 설계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굴불사지석불상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재위 742~765년)이 땅속에서 발견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문화재다.

5일 경북 경주시 서악동 고분군 내 봉분 한쪽 경사면이 붉은 흙더미를 드러낸 모습이다. 지난 2022년 9월 태풍 힌남노로 봉분 일부가 무너지는 피해가 발생했다.

힌남노가 경주를 덮친 지 반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 피해는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날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자리인 월성 남쪽 사면에는 너른 잔디 사이로 파란색 방수천이 덮여 있는 모습이었다. 굴불사지석불상과 마찬가지로 힌남노로 지반이 무너져내린 자리였다. 여기서 5㎞가 채 되지 않는 곳에 있는 사적인 서악동 고분군 내 한 거대한 봉분도 힌남노로 무너진 한쪽 면이 붉은 흙더미를 드러낸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양동마을 내 양졸정은 담장 일부가 칼로 베어낸 듯 뚫려 있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둘째 손자인 양졸당 이의징(1568∼1596년)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해 세운 이 정자의 우측 담장은 힌남노 때 무너졌다. 경주의 문화재 피해는 결국 기후변화로 인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역대급 피해를 남긴 힌남노를 기후변화로 인한 극단적 기상현상 중 하나로 평가한다. 태풍은 고위도로 갈수록 세력이 약해지거나 자연 소멸하는 경우가 많은데 힌남노의 경우 기후변화로 높은 바닷물 온도 때문에 우리나라에 상륙할 때까지 파괴력을 높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위성 자료에 따르면 힌남노가 북상한 경로 주변 바닷물 온도는 평균보다 3도 정도 높았다.

◆30년 뒤 폭우 노출 6배↑

 

기후변화가 우리나라 문화재까지 덮치고 있다.

 

비지정문화재 상영정 전소·강원도 유형문화재 방해정 일부 소실 등 피해를 발생시킨 11일 강원 산불만 해도 기후변화로 유독 건조해진 봄철 날씨가 피해 규모를 키웠다는 시각이 있다. 실제 지난해만 해도 자연재난으로 인한 문화재 피해가 150건 넘게 확인됐다. 모든 자연재난의 원인을 기후변화 단 하나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기후변화가 기상현상의 극단화를 야기해 결과적으로 자연재난 빈도를 늘리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실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2년 자연재난으로 인한 문화재 피해 건수는 총 440건으로, 이 기간 대체로 피해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연도별로 보면 2017년 22건, 2018년 25건, 2019년 86건, 2020년 106건으로 증가세를 보이다 2021년 47건으로 줄었고, 지난해 154건으로 다시 폭증했다.

 

구체적인 피해 원인별로 보면 이 기간 태풍과 비가 90% 가까이를 차지했다. 2017∼2022년 문화재 피해 원인 중 호우가 50.5%(222건)고 태풍도 37.3%(164건)나 됐다. 나머지는 화재가 3.9%(17건), 지진 2.7%(12건), 폭설·해빙이 각각 2.0%(각 9건), 강풍 1.6%(7건) 순이었다.

국제사회의 탄소 감축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세기 내 기후변화가 계속 심화하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연스레 우리나라 문화재가 맞닥뜨릴 극단적 기상현상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그간 문화재의 자연재해 피해 절반 이상을 차지한 호우 피해는 앞으로 더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 한국위원회가 문화재청 의뢰를 받아 지난해 12월 제출한 ‘문화재 분야 기후변화 대응 종합계획 수립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우리나라 건축문화재 중 극단적 강수 노출 사례 비율은 2050년대 들어 이전보다 6배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전망됐다. 건축문화재 1081건(석조 627건·목조 422건·근대건축 32건)에 대해 RCP 4.5 시나리오(RCP 4.5는 온실가스 저감 정책이 상당히 실현된 경우를 가정한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적용해 분석한 결과다. 분석대상 중 2010년대 강수강도(한 해 총 강수량을 일 강수량이 1㎜ 이상인 날 수로 나눈 값)가 20㎜ 이상인 건축문화재 비율이 3.4%(37건) 수준이던 데서 2050년대 들어 22.7%(245건)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 것이다.

5일 경북 경주시 양동마을 내 양졸정 담장 일부가 칼로 베어낸 듯 뚫려 있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로 이 담장이 무너졌다.

구체적으로 보면 석조 건축문화재는 2010년대 32건(5.0%)에서 2050년대 168건(26.4%)으로 증가했다. 2050년대 들어 가장 강수강도가 높게 전망된 석조 건축문화재는 경남 산청 법계사 삼층석탑(30.2㎜)이었고, 이어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29.1㎜), 경기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28.0㎜), 부산 금정산성(27.2㎜), 경남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26.7㎜) 등 순이었다.

 

목조 문화재는 강수강도 20㎜ 이상인 사례가 2010년대 5건(1.2%)에서 2050년대 75건(17.8%)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전망됐다. 이들 75건 중 강수강도가 가장 높은 건 경남 남해 용문사 대웅전(30.9㎜), 이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과 조계문이 각 29.2㎜, 경남 창녕 관룡사 대웅전과 약사전이 각 25.9㎜로 같았다. 근대건축의 경우에는 강수강도가 20㎜인 사례가 2010년대엔 없다가 2050년대에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관저와 경남 창원 진해우체국이 각각 22.4㎜와 20.8㎜가 되는 것으로 예상됐다.

 

문화재를 위협하는 기상현상은 폭우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폭염 노출이 빈번해지면서 화재 피해가 덩달아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축문화재의 경우 2050년대 들어 폭염일수(일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날의 연중일수)가 20일을 넘는 비중이 30%에 육박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대 폭염일수가 20일 이상인 목조 건축문화재는 46건(10.9%)이었던 데서 2050년대 들어 114건(27.0%)까지 늘어나는 것으로 전망됐다. 가장 심각한 건 충북 충주 윤양계 고택으로 폭염일수가 33.6일이나 됐고, 이어 경남 창녕 진양하씨 고택 32.6일, 전남 나주의 남파고택과 나주목 관아·향교 각 31.3일 등 순이었다.

5일 경북 경주시 굴불사지석불상 부근 경사면에 토사가 쏟아지는 걸 막기 위한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다. 굴불사지석불상은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로 무너진 토사가 덮치는 피해를 보았다.

◆기후 최상위계획에 문화재는 없다

 

이런 기후변화로 인한 문화재 피해는 정부 정책에서 그간 계속 간과된 게 현실이다.

 

정부가 11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제1차 기본계획(2023∼2042년) 내 기후변화 적응대책에선 문화재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 생물다양성·생태계 건강성 증진 차원에서 천연기념물·멸종위기종의 유전자원 보전·인공증식·복원 등은 포함됐다. 국가유산 중 자연유산 보호는 담았으나 문화유산은 빠뜨린 셈이다. 지난해 7월 시행된 탄소중립기본법에 근거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제1차 기본계획은 기후변화 대응에서 최상위계획이다. 조한나 한국환경연구원 국가기후적응센터 연구위원은 지난달 14일 국회 토론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기후위기에서 물안보 및 식량안보에 비해 국가유산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국가유산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 기후변화 최상위계획에는 비록 누락됐지만 국가와 지자체의 문화재 관련 기후변화 대응 의무 조항이 담긴 국가유산기본법안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국가유산기본법안은 문화재를 포함한 문화유산뿐 아니라 자연유산·무형유산 등을 아우르며 선제적으로 보호할 국가유산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추진 중인 제정안이다. 지난달 2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해 현재 법제사법위원회 체계자구 심사가 진행 중이다. 문체위 의결안을 보면 ‘기후변화가 국가유산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국가유산의 취약성 조사’, ‘국가유산 정책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진단과 필요한 경우 이를 저감할 수 있는 방안 모색’이 국가와 지자체 의무로 명시돼 있다.

 

문화재청은 이 조항을 근거로 국가유산 분야 기후변화 대응 기본계획 초안을 작성 중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기후변화 관련 기본계획을 만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7월 정도에 공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본계획이 문화재 부문 기후변화 적응을 위한 구체적 노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예산과 인력 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탄소중립 녹색성장 제1차 기본계획에서 드러나듯 기후변화 대응에서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현실에서 충분한 예산·인력 확보 가능성은 미지수다. 현재 문화재청 내 기후변화 적응 업무를 맡은 부서나 직원은 전무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 문제에 대해 “국가유산기본법이 제정되면 저희가 예산을 따로 확보해야 한다”고만 답했다.


경주=글·사진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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