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후취였던 ‘어린 어머니’와
함께 사는 기길현 할머니의 연대 서사
기구한 운명의 가장 화사한 순간 그려
할머니 젖꼭지에 맺힌 수많은 기억들
장례식날 가족들이 추억으로 소환해
10년전부터 찾은 남극서 경험한 경이
어머니 젖퉁이 같은 생명의 모습 추적
“이것 봐! 우니(성게) 가시가 아주 바늘 같지는 않은 것 같아.” 뾰쪽한 성게 가시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게 알도 만지고 비비고 주물럭거렸다. 심지어 냄새를 맡기 위해 콧구멍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친구가 그의 모습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 했다. “또 또 또 또 또!”
오래전 이맘때, 그는 친구와 함께 통영에 놀러 갔다가 남해가 보이는 가게에서 성게를 사 먹었다. 가지런한 판에 담긴 성게 알이 아닌, 겉껍데기부분만 잘려나간 성게가 나왔다. 숟가락이 성게 안에 꽂혀 있어서 바닷물과 함께 성게 알을 떠먹도록 했다. 소설가 천운영은 성게를 한참 주물럭거렸다.
성게 가시는 뾰족뾰족했지만, 껍데기 안의 성게 알은 육감적이고 향기로웠다. 마치 남자의 고환 같았고, 어떻게 보면 여성의 젖퉁이 같았으며, 다시 보면 부드러워서 마치 아이의 속살 같기도 했다. 남자의 고환, 여자의 젖퉁이, 아기의 속살 같은 이 느낌, 도대체 뭐지.

불현듯 성게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쭈글쭈글한 젖퉁이를 한 할머니와, 부드러운 속살의 어린아이가 나오는 이야기로. 할머니가 젖퉁이를 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인 것 같았고. 대신 꽃놀이를 나왔다가 성게를 먹고 보드라운 아이를 껴안으면…. 서촌의 게스트 하우스를 배경으로 각각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가족 아닌 가족을 이루며 사는 이야기가 할머니 서사가 담긴 연작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독골댁 할머니가 서울 사투리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염상섭의 소설이 담은 그 서울말 말이죠. 도서관에 가서 서울말 자료나 소설어 사전을 뒤졌고, 서울 할머니들을 인터뷰하러 다녔습니다. 아는 사람이나 친구 엄마를 만나서 얘기를 듣곤 했죠.”
그는 ‘현대문학’ 2011년 7월호에 단편 ‘우니’를 발표할 수 있었다. ‘우니’는 독골댁 기길현과 관동댁 순임, 두 할머니의 연대 서사이자, 어린 오누이까지 더해지는 새로운 가족 탄생의 서사이다. 독골댁은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시아버지의 후취로 들어왔다가 자식들의 반발로 쫓겨난 ‘어린 어머니’ 관동댁 순임을 거둬들인 뒤, 수십 년간 우정과 애증을 쌓으며 함께 살아간다. 두 사람은 봄 꽃놀이를 갔다가 갈 곳 없는 어린 오누이를 만난다. 독골댁이 관동댁에게 우니 맛을 가르쳐 주며 생색을 내고, 관동댁이 마음속으로 회심의 반격을 가하는 순간은 두 할머니의 가장 화사한 순간일 것이다.
‘한나한나 다 가르챠줬제. 버선 맹그는 것도 가르챠주고 나백김치 담그는 것도 가르챠주고, 우니 맛도 가르챠주고. 나도 뭐 한나 가르챠줄까? 그릏게 메느리만 이뻐했던 그 냥반이 밤마다 내헌테 머라 했는지 아능가? 요 맛은 아무도 모를 거다, 요 맛이 최고다, 요 맛이 최고야. 어릴 적에는 고 말이 고로코롬 무섭고 싫드만. 독골댁은 죽어도 그 냥반 다 모를 거이네. 암만, 내 양반인디?’(130쪽)

소설가 천운영이 ‘우니’부터 시작하는 할머니 연작 5편을 담은 소설집 ‘반에 반의 반’(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10년 만의 소설집 출간으로, 그의 다섯 번째 소설집. 소설집에는 ‘우니’를 시작으로 ‘명자씨를 찾아서’, ‘반에 반의 반’, ‘봄날’, ‘내 다정한 젖꼭지’ 등 기길현 할머니 연작 5편에, ‘우리는 우리의 편이 되어’를 비롯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4편이 더해져 모두 9편이 담겨 있다.
소설가 천운영은 왜 10년 넘게 할머니 이야기에 매달려 왔을까. 그가 그려낸 할머니들은 어떤 모습일까. 천 작가를 지난 3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우니’ 속의 독골댁과 관동댁은 매력적인 인물들인데.
“작품 속 모습은 아마 두 할머니의 생애에서 가장 화사한 순간일 것이다. 할머니들이 꽃놀이 가는 화사한 봄날 풍경으로, 강단 있는 기길현 할머니의 성격을 더 자세히,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제 할머니가 위의 후취 할머니와 같이 사셨는데,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함께 고스톱을 치고 노셨고, 할머니가 죽을 땐 남편 죽을 때보다 훨씬 많이 울었다. 앙숙, 숙적 같은 관계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친구, 혹은 자매처럼 으르렁거리면서도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표제작 ‘반에 반의 반’은 기길현 할머니의 제삿날에 친척이 모여 할머니 이야기를 한 것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다음날 큰아버지는 소설을 쓰는 ‘나’를 불러 관악산 계곡물에 빠진 할머니가 속치마 차림으로 춤추던 일은 없었다며 대신 한국전쟁 중에 있었던 강단 있는 할머니의 미담을 들려준다.
―이 소설은 어떻게 나왔는가.
“5, 6년 전 가족과 친인척 20여명이 서울 큰아버지 집에서 할머니 제사를 지내게 됐는데, 저마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서로 다른 기억을 왁자지껄 이야기하는 와중에, 할머니가 물에 빠진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거 또 쓸 거니? 큰아버지가 왜 나에게 전화했을까,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걸까. 소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 다정한 젖꼭지’는 기길현 할머니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할머니의 장례식을 그리고 있다. 발인을 앞둔 아침 식사 시간, 화제는 초인종에서 할머니 젖꼭지로 바뀌면서 주물럭거리는 수많은 추억이 소환된다.
―장례식 발인 직전 할머니 젖꼭지 이야기라니.
“나이가 먹으니 할머니 젖이야말로 아름답고 원초적인 여성적인 힘이 아닐까 생각되더라. 울고불고 송가 부르는 게 아니라, 모두 다 같이 할머니의 젖꼭지를 추억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화사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천운영은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등을,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 등을 펴냈다. 신동엽창작상, 올해의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앞으로 작품 계획이나, 작가로서 꿈이나 비전은.
“2013년 처음 남극에 갔으니, 남극에 가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이 됐다. 이대에서 동물행동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지금 남극의 동물을 소재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동물과 자연, 생태환경, 우주를 써보고 싶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선 우람한 빙산, 떼를 이뤄서 뒤뚱뒤뚱 걷다가 배를 바닥에 깔고 미끄러지는 펭귄, 깨어 있는 모든 존재를 빨아들일 것 같은 우주의 밤…. 나는 우주적 존재다, 라는 문장이 온몸으로 들어왔다. 처음 간 남극에서 과학자들을 뒤쫓아 다니다가 어느 순간 대자연 우주와 접신했다. 2013년 이후, 그는 운명처럼 남극에 빠져버렸다.
이후 10년간 몸을 바꿔가면서 거듭 남극을 찾았다. 이듬해에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서, 2021년엔 이대 에코과학부 소속 연구자로서 물범 성격 연구를 위해서 다시 찾았다. 물론, 어쩌다가 소설 ‘돈키호테’에 빠져서 소설에 나온 음식을 먹으러 전국을 배회하다가, 요리를 배운 뒤 2년간 연남동에 스페인 식당 ‘돈키호테의 식당’을 열기도 했지만.
소설가 천운영이 10년간 온몸으로 만난 남극과 어머니 젖퉁이 같은 지구생명과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그가 온몸으로 겪고 되새김질하고 소화시켜서 내보낼 새로운 ‘똥’, 소설은 어떤 맛일까. 그해 봄날, 베란다 화단에선 상사화가 싹을 틔워 올리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흙을 들썩이고 있었다. 세상에 기적 같은 건 없다고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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