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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작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하종문 "위안소는 사실상 군시설이자, 위안부 가해시스템"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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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3-01 07:30:00 수정 : 2023-02-28 14:26:49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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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는 거야.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니야?”

 

시민운동 성격의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이하 시민법정)을 함께 준비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시 한 번 연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하종문 교수

그러니까 일 년 전 일본에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협의의 강제성’과 ‘광의의 강제성’으로 구분한 뒤, 일본군의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했다.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 모집, 이송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기존 연구 성과를 깡그리 부인하는 역사 수정주의였다. 일본의 역사 퇴행에 맞서, 미국 하원에선 마이크 혼다 의원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가결됐다.

 

2008년, 위안부 문제가 요동치자 시민법정을 함께 준비한 연구자들이 다시 연구회를 조직해 강제성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했다.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묶는 작업을 하던 하종문 한신대 교수도 옛 동료들과 함께 했다. 한편으론 그 동안 묵혀놨던 연구를 재개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본사 연구자로서 그는 1998년부터 법조인 및 시민단체 활동가 등과 함께 시민법정을 준비하는 한국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특히 사실 관계와 법률관계를 담은 기소장을 쓰기 위해선 일본군 통수권자인 덴노를 포함해 총군, 군사령관, 방면군 사령관, 사단장, 여단장 등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했다.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만든 다섯 권짜리 자료집과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를 비롯한 일본 연구자들의 저술에 담긴 진중일지 등을 바탕으로 일본군 부대와 체계에 대한 노트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군 위안소 및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일본군이 어느 정도 개입하고 지원을 했을지 몰라도 민간 성매매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기에 일본군이나 정부는 없다고 주장을 했지만,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시 상황에서 위안소 업자가 어떻게 정보를 알아서 정보 누설의 우려도 없이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구성된 위안소를 전방 부대 안에 운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었어요. 전시 상황에서 군인들이 위안소에 가는 것은 평상시 외출이나 휴가를 나가서 성매매 업소에 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지요. 다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일본군 부대의 체계와 규정, 운용 실태를 살펴봐야 했지만, 2000년 시민법정을 준비할 당시에는 접근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거의 없었어요.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만든 다섯 권짜리 자료집이나 책자 등에는 진중일지 전체가 아니라 위안소에 갔던 날의 기록밖에 없어서 앞뒤 맥락을 알 수 없었죠. 특히 위안소와 피해자들이 서로 잘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전시여서 일본 군부대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어서 피해자 할머니들이 알고 있던 부대를 확정하기가 어려웠어요. 결국 자료가 남아 있는 군사령관이나 사단장과 연대장, 여단장 등으로 한정해 기소했지요.”

 

그는 기존 아시아여성기금이 만든 자료집을 면밀히 다시 읽는 한편, 다른 디지털 자료를 찾으면서 위안부의 강제성을 증명할 수 있는 기초 논문을 작성했다. 비록 두 번째 연구회는 큰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는 이때부터 틈나는 대로 일본 국회 회의록이나 국립공문서관이 개설한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디지털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는 2000년 시민법정 당시 볼 수 없었던 많은 자료들이 디지털화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국회 회의록에서 1950, 60년대 후생성이 종군 간호부에게 연금을 주기 위한 논의에서 위안부가 거론된 것을 확인하게 됐다. 위안부는 ‘정식 군속이 아니지만 준 군속 취급을 받는다’는 취지였다. 그는 이때 새로운 연구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는 위안부나 위안소와 관련된 일본군 부대들의 진중일지를 읽어나가면서 자료 목록과 그 내용, 작전 부대 등을 정리해 나갔다. 각 부대들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최후 결전기 등 시기별로, 만주와 중국, 동아시아 각국 등 지역별로 추적해 나갔다. 자료가 축적되자, 가릴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장의 위안소는 민간 성매매 업소와 달리 사실상 일본군 군사시설이었다는 사실, 사실, 위안부의 총체적인 가해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이⋯. 진중일지 관련 자료집과 논문을 펴낸 그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닥쳐오자 본격적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하종문 한신대 교수가 일본 군부대들의 진중일지를 통해서 위안소가 사실상 일본군의 군사 시설이었음을 규명한 책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휴머니스트)를 펴냈다. 2008년부터 연구를 시작한 이래 무려 15년 만에 출간된 노작이다.

 

책은 진중일지를 토대로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위안소 제도가 탄생했고, 전쟁과 함께 확장했으며, 오키나와 결전기에 완성돼 갔는지를 촘촘하게 따라간다. 이를 통해 전시의 위안소는 사실상 일본군 시설이었음을 증명하는 한편, 위안소가 위안부들의 총체적인 ‘가해시스템’이었음을 규명해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일본 사회의 우경화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백래시 역시 강해지면서 최근 관련 연구도 침체돼 있는 상황에서 순수 일본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 학술서를 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기존 위안부 중심에서 위안소 중심으로 방향을 선회한 선구적인 연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하 교수는 왜 전장의 위안소를 사실상 일본군 군사시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위안부가 아닌 위안소로 연구 방향을 선회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 교수를 지난 15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일 육군성, 상하이파견군에 콘돔 100만개 긴급 공수”

 

―무려 15년이 소요된 연구 저술인데, 힘들지 않았는지.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다. 새로운 내용, 특히 다른 사람들이 못 봤던 내용을 찾아내고 그것의 맥락이 눈에 들어올 때는 즐거웠다. 반면, 찾은 진중일지 내용이 알맹이가 없거나 아무 것도 건질 게 없을 때는 조금 힘이 빠지긴 했다.”

 

―일본군 중지나방면군이 1937년 12월 위안소를 설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등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위안소가 공식화하는데.

 

“당시 일본군 부대들의 진중일지를 보면, 상하이파견군 참모장이 12월24일 육군성에 전보로 콘돔을 요청했고, 육군성은 12월29일~31일 사이에 항공편으로 상하이파견군에 콘돔 100만개를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책 73쪽에는 콘돔 발송 문서가 공개돼 있다). 콘돔 100만 개를 배도 아닌 항공기로 긴급히 보냈다는 것을 보고서 상하이파견군이 위안소를 진짜 만들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다. 특히 일본군 114사단 사령부가 중국 공산군이 민간 성매매 업소를 출입하는 일본군을 통해 첩보를 입수하고 있다며 예하 부대에 알린 사실을 통해선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를 방첩 차원에서 추진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다른 변곡점으로 1945년 오키나와 결전 단계에선 위안소가 사실상 일본군 시설로 완성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위안소 업자와 위안부는 법적으로 군속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오키나와 결전을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면 위안부들을 사실상 군의 요원처럼 활용한다. 미군 공격이 임박해지자, 당시 보병 제36연대 본부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동쪽으로 360킬로 떨어져 있던 오키다이토 섬 수비대에게 민간인을 모두 철수시키면서도 위안부를 잔류시키라고 명령하고, 심지어 위안부들이 군 막사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 지시한다. 이는 위안소가 사실상 군의 시설이고, 위안부들은 사실상 군의 요원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결전 시기 오키다이토섬 모든 민간인 철수에도 위안부 잔류 지시도”

 

―이번 연구 저술은 어떤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군 부대들의 진중일지를 통해서 일본군이 작전 상황에서 주둔 규정과 내무 규정, 위안소 규정을 만들고 위안소를 설치해 병사들을 출입시켰다는 것을 확인, 위안소의 설치와 운용이 군의 작전실행 과정에서 이뤄진 행위라는 것을 규명해 냈다. 즉, 전시의 일본군 위안소는 사실상 군시설이라는 점이고, 위안소는 위안부에 대한 체계적이고 공식적인 가해시스템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선구자로 꼽히는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中央)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진중일지를 위안소가 실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삼는 데 그치거나, 1993년 발표된 고노담화가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고 일본군의 역할을 다소 모호하게 표현한 것과 달리, 위안소를 좀더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규명해 냈다는 평가다.

 

―그간 일본 정부나 학계의 위안부 연구 및 논의 흐름은 어떠했는지.

 

“육군성이나 큰 단위의 사령부들이 관여된 내용은 나와 있지만, 일선 부대에서 위안소를 기획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는 내용 등의 사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도항 허가를 비롯해 위안부를 이송하는 단계에선 군과 외무성, 내무성 등의 관여 흔적은 다수 포착됐다. 전체적으로 군과 일본군이 관여, 개입했다는 건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해선 여전히 미흡한 상황이었다. 일선 군부대의 작전과 주둔, 경비 등과 관련해 위안소의 설치나 관리, 이용 등을 체계적이고 시스템적으로 규명한 것은 처음 아닌가 생각된다.”

 

하종문 교수

―연구 방향을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위안소로 선회한 것도 주목된다.

 

“위안부 및 위안소의 강제성이나 범죄성은 그동안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규명해 왔다. 살아계신 할머니가 이젠 몇 분 되지 않는데,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위안소는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 및 인권유린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료 역시 많이 남아 있다. 위안부 연구의 새 돌파구가 될 수가 있다. 게다가 위안소 연구는 확장성이 있다. 피해자 할머니들과 연결하는 작업은 힘들지만, 위안소라고 하는 가해 체계에 대해선 비교 연구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시 여성의 성폭력 실체나 본질을 밝혀내는 데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더 보완하거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일본 군인들의 회상기와 진중일지 내용을 맞춰나가면서 시기와 장소, 부대를 특정하는 작업을 추가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이어서 다시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과 맞추는 작업도 후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연구가 맞아 떨어지면 일본군 위안부 및 위안소의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아울러 위안부의 이송도 군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 여러 부처가 연루돼 있기 때문에 자료 정리 및 분석, 정교화 작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국내 일부 인사들의 ‘빈곤 여성 프레임’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일부 국내 인사들이 평시의 기지촌 앞 성매매 업소와 전장의 일본군 위안소를 동격으로 놓고 비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조선인 아버지들이 딸을 민간 성매매 업자에 팔았고, 민간 업자가 전선에서 위안소를 만드는 게 뭐가 문제냐’며 ‘빈곤 여성 프레임’을 주장해 온 일본 보수 우익의 주장과 뭐가 다른가. 민간 업자가 어떻게 전시 상황에서 마음대로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최전선까지 가서 부대 안에 위안소를 세우고 운용할 수 있겠느냐. 평시의 민간 성매매 업소와 전시의 군 위안소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일본군 위안부 및 위안소는 식민 지배의 전시 여성 프레임으로 봐야 한다.”

 

“난 반일 아냐⋯역사 직시해야 동아시아 공동체 미래 열려”

 

“자네 한문 할 수 있나?” 역사에 관심이 많던 서울대생 하종문은 4학년 무렵 국사학과 편입을 염두에 두고 해당학과 교수에게 상담을 받는데, 교수가 불쑥 묻는 게 아닌가. 국사학은 아무래도 한문 자료를 많이 접해야 하는 학문 분야여서 한문을 어느 정도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한문을 배우지 않았던 그는 국사학과 편입을 포기했다.

 

대신 일본을 현장 조사해 인류학적으로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인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석사과정 한 학기 만에 인류학으론 자신의 학문적 갈증을 다 풀 수 없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꿔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볼까.

 

1986년 여름, 그는 일본 근현대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 근현대사를 공부하기로 생각한 것은 일본 고대사나 중세, 근세사에 비해서 아무래도 한문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데다가 한국 근현대사에 중첩돼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듬해 2월 일본유학시험을 합격한 뒤, 10월 도쿄대 일본사학과 연구생으로 입학했고, 1년 반 동안의 연구생 생활 끝에 1989년 4월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이즈음 일본의 군부, 특히 전시 노동력동원 문제를 연구하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 하종문의 원점이었다.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고 부산으로 자란 하종문은 일본의 전시 노동력 동원 문제를 주제로 1991년 3월 석사학위 논문, 1995년 3월 박사학위 논문을 차례로 받으면서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듬해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이후 단행본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 『일본사 여행』,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이하 공저),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여는 역사』, 『화해와 반성을 위한 동아시아 역사인식』 등을 펴냈다. 옮긴 책으로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일본인의 전쟁관』 등이 있다.

 

―연구나 저술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1998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했지만, 이에 앞서 서승 선생을 비롯해 한중일 연구자들이 만든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에 참여, 타이완의 2.28사건이나 한국의 4.3, 광주민주화운동, 일본의 전쟁 책임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난징학살을 비롯한 중국의 전쟁 피해 등 20세기 벌어진 국가 폭력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해왔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역사 교과서 문제가 터지면서 아시아 평화 역사교육 연대 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크게 보면, 위안부 문제와 역사 교과서 문제가 두 축이고, 이것을 묶는 전체 키워드는 과거사 청산과 역사 화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구나 학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제가 추구한 목표나 문제의식은 늘 같았다. 20세기 전반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동아시아에 끼친 부정적인 역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 라이프 워크, 평생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역사 연구자이니까 역사적 사실, 근거를 바탕으로 출발해야 한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거대 담론은 톱다운 방식으로 논리 정연한 이론으로 현실을 바라봤다면, 저는 역사학을 하면서 구체적인 팩트와 사실을 바탕으로 사고와 논의를 전개하는 버텀업 방식으로 연구했다.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를 읽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시대상이나 미래 전망을 추출해내려 했다. 젊을 때는 잘 몰랐는데, 사료를 읽는 게 매우 즐겁다. 50대 중반을 지나면서 사료 속에 담긴 구체성, 실감을 읽어내는 능력이 더 생겨난 것 같다.”

 

하종문 교수

―왜 동아시아 역사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지.

 

“당신은 왜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비판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일본이 저질렀던 잘못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 일본의 잘못을 미래 지향적으로 올바르게 청산하지 않으면 우선 한일 관계도 삐걱거리게 되고, 결국 중국 문제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를 잘못 풀면 일본 민중에게도 피해가 되고, 한국과 중국 민중에게도 피해가 된다. 역사 문제에 제대로 된 인식과 대처를 하지 않는 일본 모습은 일본의 미래에도, 일본인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지금 중국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를 20세기적인 용어로 바꾸면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21세기 중국 패권주의를 비판하려면, 자신들이 저질렀던 20세기 과거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청산을 해야 한국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얘기다.”

 

인터뷰 내내, 진한 콧수염과 턱수염이 인상적인 하종문 교수는 질문에 대해서 단 1초의 주저함이 없었다. 이야기 역시 쉼 없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답변 내용이 허투루 넘어갈 만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나하나 경험과 자기만의 사유가 쌓인 답변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15년 이상 물고 늘어진 집념의 연구자다웠다.

 

혼자 모니터를 보며 사료 읽는 걸 즐긴다는 그가 들려준 생활은 단순했다. 오전 6시쯤 일어나서, 커피를 마신 뒤, 열심히 테니스를 치고, 학교에 가거나, 일이 없으면 낮에는 무조건 공부하고, 해가 지면 공부를 멈추며, 밤 10시가 넘으면 자고⋯. 가급적 모임을 만들지 않고, 만들어진 모임엔 가지 않으려 노력하며, 모임에 가더라도 가급적 빨리 끝내고, 지체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상가는 가급적 낮에 가고, 술은 혼술로⋯. 공존공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꿈꾸는 한 명의 성실한 연구자가 그렇게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일본을 싫어하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반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일본을 위해서, 당연히 한국을 위해서 연구를 하고 있지요. 조금 큰 목표를 말한다면, 19세기 말 완성하지 못했던 공존공영의 틀이나 동아시아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을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한 동북아 균형자라는 단어는 아닐지 모르지만,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공존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데 한국의 역할이 있을 겁니다. 이는 한일 역사 문제와 맞닿아 있지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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