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공식적 수교 관계는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시작됐지만,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보인 최초의 기록은 18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극동에 대한 조사 임무를 맡은 에드먼드 로버츠는 루이스 매클레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당시 조야에서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지만 1854년 페리 제독이 일본과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해 동아시아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조선은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조선은 1850년대 중반에서 1860년대 중반까지 미국 선박이 수차례 조난하면서 미국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했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있었음에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조난자들을 구조했다. 그러다 1866년 8월 미국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 백성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1871년 발생한 신미양요의 배경이 됐다. 미국은 자국민 상해와 선박 방화에 대한 항의로 미군을 파견해 강화도를 침공했다. 미국은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기대한 조선의 개항에는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고수에 추가적인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 후, 일본이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강압적인 통상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자,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을 재추진했다. 조선은 일본·중국·러시아 3국의 갈등 속에서 세력균형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대비하기 위한 중국 측의 연미론과 중재로 미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중국의 이홍장은 마건충 등 외교관들을 조선에 파견해 ‘미국은 야심 없고 부강한 나라이므로 미국과 먼저 조약을 체결하고 의지’할 것을 권했고, 이를 통해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를 설득했다.
조선은 문호개방의 대세를 더는 물리치지 못하고, 1882년 5월 인천 제물포에서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미수호통상조규’다. 조선이 서양국가와 맺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며, 미국은 조선과 수교를 맺은 최초의 서양국가다. 당시 실질적인 세계 최강으로 부상하는 미국과 가장 먼저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의미 있는 행보였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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