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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부르지 못할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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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2-15 23:08:43 수정 : 2023-02-15 23: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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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나’는 ‘누구’한테서 이름이 불려지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름이 불려지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된다.

동양사회는 이름을 유독 중시한다. 명분(名分)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이 크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는 게 모두 명분이다. 충이니 효니 하는 도리가 이 명분에서 나온다.

성명학, 작명학은 당당히 학문의 반열에까지 올라 있을 정도다. 이름으로 사람의 운세까지 알아맞히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태어나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천한 이름을 임시로 붙여줬다. 세종대왕은 막동이, 황희 정승은 도야지(돼지의 사투리), 고종은 개똥이로 불렸다고 한다. 제 이름을 지어줄 때에는 항렬에 음양오행, 사주, 획수 등까지 따졌다.

조선시대에는 제 아무리 고관대작의 자녀일지라도 쓸 수 없는 글자들이 있었다. 왕의 이름, 즉 ‘휘(諱)’로 쓰인 글자다. 세종 이도의 ‘도(裪)’, 세조 이유의 ‘유(瑈)’, 영조 이금의 ‘금(昑)’ 등이 그것이다. ‘諱’라는 한자 자체가 ‘꺼린다’는 뜻이다.

이름을 지을 때 이런 글자를 피하는 걸 ‘피휘(避諱)’라고 한다. 왕들이 좋은 글자를 선점해 버리면 백성들은 어찌할꼬. 이를 ‘어엿비(불쌍히) 너겨’ 왕들의 이름을 외자로 지었다. 한 글자로 지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를 택했다.

북한 당국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이름 ‘주애’를 쓰지 못하도록 한다는 소식이다. 최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소식통을 인용해 최근 평안북도 정주시, 평안남도 평성시 등에서 ‘주애’로 주민등록된 여성들에게 이름을 고치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주애’라는 ‘휘’를 ‘피휘’하라고 한 격이다. 스스로 왕조국가임을 증명하는 꼴이기도 하다.

이러니 4대 세습 얘기도 무리는 아니다. 제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는 북한 주민들을 ‘어엿비’ 여겨야 할까. 아니면 진영에 갈려 ‘재앙’이니 ‘굥’(윤을 뒤집은 글자)이니 하며 전·현직 대통령 이름을 가지고 마음껏 야유하는 우리가 행복한 것 아니냐고 위안 삼아야 할까.


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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