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원… 유기적 관계 상징
500년 성리학 가치, 몸에 배게 해
갓을 한 몸처럼 여긴 조선 선비들
몸가짐도 ‘꼿꼿’… 절제 덕목 지켜
정교한 수공예의 정수
머리카락보다 가는 죽사·말총 사용
은은하게 빛 통과… 아름다움 표출
갓 팔았던 운종가 ‘입전’ 문전성시
일제 식민정책에 갓 문화 말살당해
“갓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자다. 바람도 비도 햇빛도 막아주지 못하는 비실용성과 불편함 때문에 괴상하고 우습고 미개한 물건으로 평가된다.”
개화기 프랑스에서 건너 온 달레(1829∼1878) 신부가 자신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 남긴 글이다. 이 땅을 처음 밟은 서양인들은 갓을 보고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경복궁역 주변 한복대여점에서 인기를 끄는 일등공신은 갓 쓰고 재미난 사진 찍기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갖춰 쓰지 않은 탓이다. 사실 갓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뒤 풍잠에 걸쳐 써야 제모습이 살아난다.
왕이나 황제가 지나갈 때 절은 해도 갓을 벗어 인사하는 법은 없었다. 조선 선비들은 혼자 있을 때나 손님을 맞을 때나 항상 갓을 단정하게 썼다. 갓을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길 만큼 지극히 아꼈다.

◆우리의 갓- 땅과 인간, 우주를 담다
갓의 형태는 땅을 뜻하는 ‘ㅡ’와 인간을 의미하는 ‘ㅣ’가 합쳐진 ‘ㅗ’의 모습이다. ‘ㅗ’의 위는 비어 있는 공간, 우주다. 갓은 땅과 땅 위에 사는 인류의 조화를 상징한다. 땅과 인류와 우주 공간은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삼위일체 관계임을 나타낸다. 갓은 삼위의 질서를 상징하면서 성리학적 우주관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갓은 크고 작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원이 수많은 작은 원들을 포용하고 있는 형태다. 원은 꾸밈이 전혀 없는 가장 단순한 모양이다. 그러나 곡선의 부드러움과 완전함을 지닌 원은 자연의 순환과 완성을 의미한다. 우주의 크고 작은 것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 득이 되고 덕이 되는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관계가 조선의 유학자들이 인간 세계에서 꿈꾸었던 성리학적 우주관이다. 원은 인류가 추구하는 궁극적 우주질서의 모태이자 근원이다.
갓은 성리학의 상징이다. 갓은 깊숙이 눌러 쓰거나 머리에 꽉 맞게 쓰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가벼이 얹는 관모다. 착용하는 사람에게 몸가짐의 절제를 요구한다. 침착함과 진중함이란 덕목이다. 갓을 쓴 조선의 양반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상체를 반듯하게 편 채 머리를 경망스럽게 흔들지 않으며 넓은 보폭으로 의젓하게 걸었다. 500여년 동안 이 땅을 관통했던 성리학의 세계가 몸에 배게 한 습성이었다. 갓은 절제된 권위와 위엄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의 갓- 멋과 빛을 품다
갓은 초정밀 수공예의 절정이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대오리와 말총 등 미세한 재료들이 숙련된 장인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야만 비로소 갓으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갓에서는 수많은 원과 직선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아름다움이 배어 난다. 햇빛은 갓의 양태(테두리부터 챙 부분)에 짜인 극히 미세한 구멍을 통과하여 은은하고 아른거리는 색감의 빛으로 재탄생한다. 그 빛은 명암에 구애받지 않는 다소 몽환적인 빛이다. 서양 문명은 뚜렷하게 명암만이 존재하는지라 밝은 것도 아니며 어두운 것도 아닌, 그렇다고 희뿌연 회색도 아닌 갓의 이러한 빛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련한 장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이 빛을 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원과 직선을 교직하면서 미세한 구멍을 남겨둔다.
햇빛이 갓의 양태를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빛의 색감은 이처럼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갓을 착용한 사람의 얼굴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 보인다. 상대방의 시선을 더욱 끌어들이는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을 찾았던 서양인들은 갓을 처음 보고 세 번 놀랐다. 먼저 갓의 크기에 놀라고 그토록 큰 갓이 새털처럼 가벼운 것에 또 놀랐다. 그리고 갓을 만들어낸 조선인의 정교한 손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공정은 지극히 어렵다. 가는 대나무실(죽사)을 엮어서 갓의 테를 짜는 양태작업, 말총으로 대우부분(몸통)을 엮어짜는 총모자작업, 이 둘을 연결 조립하고 명주를 입힌 뒤 옻칠하는 입자작업으로 나뉜다. 각 공정을 익히는 데만 10여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다른 공정의 기술을 배울 시간과 여력이 없다. 세 장인이 분업해 하나의 갓을 완성해야 하는 이유다.

◆운종가 입전
조선시대 갓의 주 생산지는 통영과 제주였다. 통영에서 만들어진 갓을 ‘통량’, 제주 갓을 ‘제량’이라 불렀다. 당시엔 대부분의 물화가 서울로 몰려들었다. 갓뿐 아니라 쌀과 건어물, 소금, 면포, 종이, 가죽, 놋그릇, 철물, 의복 등 모든 생필품이 종로에 빼곡히 들어선 육의전과 시전 행랑에서 팔렸다.
이 지역은 전국에서 상품 매매와 소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으로, ‘사람과 재물이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하여 ‘운종가(雲從街)’라 불렸다. 광화문 우정청에서 동쪽으로 종로3가 탑골공원까지 거리 양편을 가리킨다. 보신각 종루 남쪽 편이 핫플레이스였다. 갓을 파는 ‘입전’이 주로 이곳에 있었다. 종일토록 가장 붐비는 가게가 입전이었는데, 최상품에서 저가품까지 다양한 등급의 갓을 갖춘 데다 조선말기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갓을 착용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인은 갓을 고를 때만큼은 수중의 돈을 가늠하여 가성비 최고의 갓을 찾았다.
프랑스 학자 조르주 뒤크로는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에 “가장 사람이 북적이는 곳은 갓 장수네로 … 얼마나 진지하게 갓을 고르는지 … 조선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좋아하지만 갓만은 예외여서 고급품을 선호한다”고 적었다.

◆축출당한 갓
조선 500년을 누리고 단발령(1895)이란 삭풍에도 살아남았던 갓이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들어서자 급격히 사라져 버렸다. 일본의 광적인 군국주의와 대륙침략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며 침략 국가의 마각을 드러낸 일본은 대조선 식민정책을 본격적으로 쏟아냈다. 주권을 잃은 나라에서 갓 또한 광란의 시대를 이겨내지 못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