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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마음을 먹었을까. 그때. 늘 아파트 둘레길로만 산책을 다니던 내가 가보지 않은 길로 발길을 돌린 것은. 그곳에 길이 생긴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도 나는 한 번도 그 길을 가보지 않았다. 사람이 무감각한 건지, 아니면 무심한 건지 나는 언제나 그곳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예전에는 일부러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언제부턴지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 버렸다. 나이가 들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간혹 모르는 길을 갈 때면 생경한 풍경이 주는 설렘과 호기심보다는 혹여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고, 그에 따른 심리적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더해 사람 사는 동네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기심과 모험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날,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나는 평소 같지 않게 동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릴 때 읽었던 ‘비밀의 화원’이 문득 떠오르더니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그 길이 비밀의 화원으로 통하는 문처럼 다가온 것이. 그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주인공 어린 소녀가 마주쳤던 놀라운 풍경을 떠올리며 나는 그 길로 향했다. 길에 들어서니 오며 가며 지나면서 보던 겉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그저 똑같은 길이려니 생각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처럼 천변에 들어선 여느 길들과 고만고만하게 생겼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아니었다. 그곳은 날것의 자연과 인공의 구조물이 적당히 섞여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하긴 동네가 산자락 밑에 위치해 있는 데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전부 논밭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버스 정류장 뒤로 원두막까지 있던 전형적인 농촌이 이 동네였고, 상전벽해의 현장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곳곳에 날것의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날것의 자연을 이용한 공원도 군데군데 들어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파트 뒤편, 산과 맞닿아 있는 아파트 둘레길만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곳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흑림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는 그 짙은 그늘과 수액의 향기가 좋았다. 한데 새로 간 길은 그 흑림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이 열려 있어서 그런지 햇빛과 바람이 살아 있었고, 그 햇빛의 입자들이 바람과 함께 간지럽게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왜 이제야 올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을 잃지 않는다면 그만큼 삶이 풍요로울 텐데, 나는 스스로를 내가 만든 틀 안에 가둬놓아 버렸다. 정말, 그동안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생의 행로든 산책길이든 그 새로운 길 위에서 어떤 풍경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다. 가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그 길들이 준비해 두고 있었을 또 다른 내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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