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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3월 초에 점령당했던 전략 요충지 헤르손 지역을 8개월 만에 탈환했다. 러시아군은 무기와 옷가지도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철수했다고 한다. 제1야당의 대표와 일부 정치인으로부터 ‘코미디언 출신으로 나라 운영을 잘못하여 침략을 자초했다’는 어이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서방의 지원을 얻어내며 역사에 남을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리더십의 핵심은 목숨을 걸고 푸틴이라는 절대 독재자의 패권주의에 결연히 저항하고, 우크라이나 국민과 국제사회의 통합된 지지를 획득하는 ‘당당한 소통’이다.

중국 옌볜의 조선족 문학자로 생을 마감한 김학철(金學鐵) 선생도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감수하며 소신을 당당히 소통한 분이다. 선생은 원산 태생으로 서울에서 보성고를 다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에 감동하여 독립운동을 할 각오로 상하이로 갔다.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25세이던 1941년에 중국 허베이성 후자좡(胡家莊)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다리에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무기수로 나가사키 감옥에 수감되었다. 전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피고름이 흐르는 무릎을 4년여나 치료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린 후에야 다리를 절단했다. 일제의 항복으로 귀국했다가 1946년 입북하여 4년간 로동신문 등의 기자로 일하다, 김일성 우상화와 전제적 독재를 비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와중에 ‘우파 반혁명현행범’으로 몰려 51세이던 1967년 12월부터 10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미발표 소설 ‘21세기의 신화’에서 마오쩌둥의 시행착오와 개인 숭배를 비판한 내용 때문에 ‘반당·반사회주의 독초’로 몰려 수모와 고통을 당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후일 중국의 석학이 지적했듯이 1인 권력 체제를 위해 국가에 헌신한 사람을 ‘우붕’(牛棚: 소 우리)에 가두고 학대와 폭력을 행사하는 시기였다. 지옥을 능가하는 공포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던 암울한 시공간이었다.(‘우붕잡억’, 지셴린(季羨林))

선생은 1980년 복권되어 65세의 나이로 25년 만에 창작을 재개하여 초인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죽음이 가까이 오자 결연하게 21일간 곡기를 끊고 2001년 9월25일 순천명하였다. 생의 전 과정에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김학철 평전’, 김호웅·김해양 편저)는 자신의 말을 실행했다. 거짓과 선동이 횡행하는 세상에 당당하고 고절한 소통을 남겼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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