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직장 등 통해 배워도…대응능력 갖춘 성인 10명 중 1명꼴
프랑스 등은 응급처치 교육 이수해야만 운전면허 취득할 수 있어
조희연 교육감 “서울 모든 학생 안전 교육 강화 방안 마련 고민”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을 계기로 응급처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29일 밤 사고가 벌어진 당시 순식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심정지로 쓰러지자, 일반인들도 힘을 모아 심폐소생술(CPR)을 시도했다. 온라인 게시판에 ‘사고 현장에서 CPR을 하고 왔다’는 제목의 글을 올린 한 시민은 “구급대원이 CPR 자격증 소지자는 제발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요청했다”며 “‘제발 살아라’ ‘제발 살아라’ 하면서 가슴을 압박했다”고 썼다. 여러 다른 영상에서도 “CPR 가능하신 분이 있느냐”고 다급하게 외치는 장면과 이 외침을 들은 시민 10여명이 경찰 폴리스라인을 넘어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 등이 확인된다.
CPR 등 응급처치는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할 시 희생자를 줄이는 주요한 방법으로 꼽힌다. 이태원 참사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심정지의 경우 골든타임이 4~6분이다. 이 사이 CPR, 자동심장충격기(AED) 등을 통한 신속한 응급처치는 환자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

2019년 통계청 보고서에 따르면 의료인 외 심폐소생술 시행 시 생존율은 15.0%로, 미시행 시 6.2%보다 2.4배 가까이 높았다. 대한심폐소생협회는 “심장마비를 목격한 사람이 즉시 CPR을 시행하면 하지 않은 경우에 비해 환자의 생존율을 2∼3배 높인다”며 “이태원 참사 이후인 전날 홈페이지 접속량이 평소보다 4배로 늘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CPR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 12.9%에 불과
현재 우리나라는 학교와 직장, 군대(예비군·민방위) 등에서 CPR 교육을 시행하고 있지만, 실제로 CPR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12.9%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12월에 발표한 ‘응급처치 교육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3년 간 응급처치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성인 500명 가운데 180명(36.0%)은 직장, 141명(28.2%)은 예비군·민방위 훈련, 81명(16.2%)는 학교(초·중·고), 50명(10.0)은 사설교육기관, 58명(9.6%)은 기타에서 배웠다고 답했다.
조사대상 500명 가운데 심정지 환자 발생시 응급처치 방법을 알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310명(62.0%)였으나, 실제 응급처치 순서, CPR, AED 사용 등 적절한 대응능력을 갖춘 이들은 40명(12.9%)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소비자원은 “특정 직업 종사자 외 일반인은 응급처치 재교육 기회가 부족해 심정지 환자 발견 시에도 대응력이 부족할 수 있어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응답자 가운데 346명(69.2%)은 현행 응급처치 교육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고, 그 이유로는 실습·실습장비·교육기회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학교보건법에 따르면 학생과 교직원은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응급처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소비자원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자료를 확보한 15곳(인천·세종 제외)의 응급처치 교육 실시율은 2019년까지 99% 이상이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비대면 수업 등이 이뤄진 2020년에는 실시율이 96.4%로 약간 떨어졌다. 이처럼 높은 교육 실시율에도 최근 4년 내 고등학교에서 응급처치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대학생 163명 중 응급처치 내용을 모두 숙지한 학생은 11.7%(19명)에 그쳤다.
소비자원은 “2014년 학교보건법 개정으로 학교에서 응급처치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학생들에 대한 교육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며 “조사 결과 응급처치 활용 능력이 낮은 수준인 것으로 확인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특정직무 종사자 이외의 일반인은 응급처치 재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어 심정지 환자를 발견하더라도 대응능력이 부족할 수 있다”며 “응급처치 의무교육 대상자 외에 자격증 취득과 연계 또는 지역사회에 기반한 시민 대상의 교육기회 확대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응급처치 수행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 실습을 장려하고 있다. 유럽의 6개 국가(영국,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에서는 12세 이상 학생을 대상으로 CPR 교육을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고, 16개 국가에서 권장한다. 최근 영국은 모든 국립학교에서 심폐소생술이 포함된 보건교과목을 의무 이수하도록 관련 법을 개정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등에서는 응급처치 교육을 이수해야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한다. 미국의 경우 39개 주에서 고교 졸업 자격요건으로 심폐소생술을 넣어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학교에서부터 안전교육 강화해야
우리도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CPR은 물론, 다양한 상황에 대한 안전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교육 현장에서는 초등학교의 경우 보건 교과가 따로 없고, 중·고교는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어 다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 교육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교육부가 현재 개정 중인 2022 교육과정 시안을 보면 보건 교과 ‘건강안전’ 단원에는 CPR 교육에 대한 내용과 생활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요인 파악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통해 갖춰야 할 지식과 역량을 ‘성취기준’으로 정한다. 중학교 보건과 2022 개정 교육과정(시안) 학생들이 ‘상황에 따른 응급처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고, 다양한 위기 및 응급상황에서 적절한 응급처치와 협력적 대응 방안을 탐색해 적용’하도록 ‘성취기준’을 정하고 있다.
아울러 ‘응급의료체계의 활용 방안을 탐색하고 심폐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의 원리·사용법을 익혀 협력적으로 바르게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응급상황에서 심폐소생술 및 자동심장충격기 사용을 포함한 응급처치 방법을 익혀 협력적으로 적용’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이런 보건 교육이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초등학교에는 보건 교과가 따로 없어 체육 시간이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 등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시간을 쪼개 보건 관련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중·고교의 경우도 보건 교과 자체는 선택과목이어서 응급상황 대처와 관련된 교육은 체육 시간 등에 단기간, 집중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등학교의 경우 일반고를 기준으로 1학년 때는 공통과목을, 2∼3학년 때는 선택과목을 배우는데 ‘보건’ 과목은 보건의료계열로 진로를 정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진로선택 과목’으로 분류돼 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조문한 후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서울의 모든 학생들이 심폐소생술같은 안전교육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방안까지도 이번 기회에 고민해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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