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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의동행] 샛노란 은행잎이 말 없이 진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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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0-25 23:54:26 수정 : 2022-10-25 23: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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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은행잎의 계절이 돌아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과 햇빛과 장소에 따라 그 노란색은 깊이와 농도를 달리한다. 연노랗거나, 아직 녹색빛이 가시지 않았거나, 아니면 갈색빛이 돌 만큼 진하거나. 각기 저마다의 시간으로 바람과 햇빛을 견뎌낸 결과다. 십인십색이라고, 그 모양이 사람과 같지 않은가.

나는 지금도 그곳을 잊지 못한다.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막내 딸, 화길옹주가 살던 남양주의 궁집 말이다. 옹주가 살던 집을 가리켜 궁집이라고 부르는데, 그곳은 온통 노란 세상이었다. 궁집이건, 작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건, 가리지 않고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노란 잎은 점점이 흩날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그 노란 색의 향연이라니! 그곳에 좀 더 머물러 있으면 나 역시 노란 물이 들어, 노란 입자로 떠다닐 것만 같았다.

은행잎을 보고 있노라면 명치 한구석에 통증이 인다. 처음에는 쿡쿡, 바늘로 찌르는 듯 간헐적으로 찾아오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변한다. 일종의 계절앓이인 셈인데, 그 통증의 원인을 찾아가면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는 화장실에 가시려다 넘어지면서 골반뼈가 부서졌고, 그 수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그랬다. 그때도. 의사로부터 아버지의 사망 선고를 들었을 때도 똑같은 통증이 들이닥쳤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촉발된 위경련이라고 했다. 통각을 마비시키는 주사를 맞고 그 통증을 물리쳤지만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 다시 그 통증을 만났다. 단벌로 계절을 나던 아버지는 유품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존재가 세상에 왔다 갔는데도, 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데도 고작 상자 네 개라니. 그 네 개의 상자는 아버지의 일흔셋, 한생을 담기에 충분했다. 그 적은 유품들을 보고 있으려니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렇게 끌려나온 유품들 속에 약봉지가 들어 있었다. 무슨 약일까. 펴보니 은행 추출물로 만든 혈액순환 개선제였다. 평소에 아버지는 혈액순환 장애를 겪고 계셨고, 보충제로 그 약을 드셨다. 아니, 잘 드시고 계신 줄 알았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물자가 풍부하지 않았던 터라 그 은행 추출물 보충제는 꽤 값이 나갔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다면야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건강을 위해 그 알약 하나 마음 편하게 드시지 못했다. 나는 그 은행 추출물 보충제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 은행잎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먹다 만 약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이제 내가 그 약을 먹을 때가 됐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을 떨구는 나무들은 다가오는 겨울을 잘 나기 위해 저를 비워내는 중이다. 따져보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것도, 내 상실의 통증도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명 활동이다. 그러니 통증 또한 감사할 일이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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