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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경의행복줍기] 슈퍼맨만 영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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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0-18 22:54:58 수정 : 2022-10-18 22: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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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등 영화 속 영웅들한테 열광한다. 그러나 영웅은 영화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한 대학교 바로 앞 순댓국집 주인은 욕쟁이 할머니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 단골로 드나드는 학생들은 할머니의 욕을 진한 순댓국 국물만큼 구수하다고 좋아한다. 할머니는 찌그러진 양은 그릇에 방금 쪄 낸 달걀 한 알을 넣어 무심한 듯 나무 상 위에 놓고 다닌다. “오늘 내 생일이야.” 다른 날은 “영희 생일이야” “순이 생일이야” 한다. “영희가 누구예요?” “응, 있어. 내 동무.” 할머니는 할머니만 아는 명분을 내세워 학생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한다. 먹어도 허기가 안 채워지는 청춘들은 따뜻한 달걀 한 알에 힘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그건 힘든 삶과 맞설 용기로 이어진다. 할머니는 등록금도 보태주고 약값도 내준다. ”나중에 꼭 잘 되어 갚아라” 하면서. 실연당해 울상인 학생 앞에는 순댓국에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서 갖다 준다. 실연을 이기는 건 매운 맛이 최고라면서, 실연 한 번 안 당해 본 청춘은 청춘도 아니다, 라고 등을 한 대 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쟤도 얘도 당하는 실연이라니 그 공평함에 마음이 놓인다.

동네 입구에 찐빵 가게를 하는 주인 덕호씨는 어둠이 조금씩 물드는 시간 저만치에서 퇴근해 돌아오는 김 선생을 본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딸부잣집 가장이다. 식구가 자그만치 아홉 명이다. 덕호씨는 재빨리 팻말을 꺼내 세워 놓는다. ‘50% 세일.’ 김 선생은 장사가 안 되는 이웃을 걱정하면서도 식구 수대로 찐빵을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찐빵 봉지를 안고 가는 김 선생의 뒷모습을 보며 덕호씨는 슬며시 미소 짓는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찐빵을 매일 사 갖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 항상 맨 마지막으로 드시는 어머니인지라 식구 수대로 사 가야만 어머니가 찐빵을 드실 수 있어 늘 망설이는 김 선생을 덕호씨가 알아본 것이다. 김 선생에게만 특별세일하는 찐빵 가게.

고3 수험생 영우는 등교 시간에 서둘러 운동화를 신으려다 문득 그 옆에 놓인 아버지의 구두가 눈에 들어 온다. 낡고 누런 때가 잔뜩 낀 구두. 자신의 운동화는 제법 값이 나가는 메이커다. 그리고 보니 아버지의 빛바랜 회색 코트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초등학교부터 본 것 같다. 며칠 전 엄마를 졸라 산 오리털 파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영우는 지각을 하더라도 아버지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닦고 구두약을 칠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이미 너무 낡았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짊어진 아버지의 삶의 무게가 느껴져서. 그날 영우는 아버지와 같은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그 어느 날보다 정성껏 허리 굽혀 인사했다. 경비 아저씨, 택배 아저씨, 선생님들. 매일 부딪히는 우리의 이웃, 그들이 진정한 영웅은 아닐는지….


조연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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