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協 회장 시절 '모스크바 도서展' 참가 성사
“책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명감이나 긍지를 갖지 않고서는 버텨내기 어렵다”면서 무려 60년 가까이 교육서적 출판의 외길을 걸어 온 권병일 지학사 회장이 1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1932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 서울대 법대(11회)를 졸업하고 법조인이나 관료가 되는 대신 출판계에 뛰어들어 1965년 도서출판 지학사를 세웠다. 지난 57년간 ‘교육 백년대계’라는 신념 아래 교과서와 교재 개발에 힘써왔다. 지금도 지학사는 공교육의 핵심인 교과용 도서 개발을 근간으로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국정·검정·인정 전 과목 교과서를 발행하고 있다. 학습참고서 ‘하이라이트’ 시리즈와 월간 ‘독서평설’ 등은 지학사가 내놓은 대표적 브랜드로 꼽힌다.

법학도로서 출판인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고인은 1988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영국의 저명한 출판 입문서 중 ‘좋은 책을 만들면 돈을 벌지 못한다 할지라도 생활은 할 수 있다’는 구절을 보고 이거다 싶어 출판사를 차렸다”며 “고생은 좀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백번 잘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어 “책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명감이나 긍지를 갖지 않고서는 버텨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지학사가 출판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고인은 출판계를 대표해 왕성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1974년 사단법인 학습자료협회 부회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대한출판문화협회 부회장(1984∼1987)과 회장(1988~1992),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이사(1999~2003) 등을 지냈다. 특히 출협 회장으로 재직하던 1989년 소련(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도서박람회 참여를 성사시켜 한국 도서를 러시아 문화권에 처음 선보인 것은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이처럼 한국 출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1992), 서울시 문화상(1996), 대한민국교육산업경영인 대상(2007), 대한출판문화협회 감사패(2010)와 한국교육학회 감사패(〃) 등을 받았다.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관리한 고인은 2015년 지학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당시 83세 고령임에도 기념사를 통해 “내일을 향해 새로운 각오로 다시 나아가야 할 때”라며 임직원들한테 ‘미래에 대한 대비’를 주문했다. 이어 “지난날 영광을 누린 출판사 중 지금은 초라해졌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변화에 발맞추지 못했고,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라며 지학사 구성원들에게 “암벽 등반을 할 때처럼 내려다보면 아찔하고, 올려다보면 정상이 어디쯤인지 까마득하지만 그럴수록 손끝과 발끝에 힘을 주면서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유족으로 부인 민숙자씨, 자녀 권준성(벽호 대표)·준구(지학사 대표)·희정씨, 사위 최대우씨(한국외대 교수, 애자일소다 대표) 등이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7시. (031)78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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