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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없는 삶’ 고백… 칼 같은 글로 환부 드러내

입력 : 2022-10-11 20:30:00 수정 : 2022-10-11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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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佛 아니 에르노 작품세계

佛 소도시 릴본 출생… 1974년 등단
결혼·모친의 죽음·유부남과 연애 등
사실·체험 근거해 진솔한 감정 서술
통찰력 담은 자전적 문학세계 구축
“세상 견디게 하는 건 사랑·글쓰기”
적나라한 성 묘사 ‘노출증’ 비난도

그해 가을 일요일 밤, 옛 소련 레닌그라드 한 호텔 방에서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 외교관 A와 살을 맞대고 앉았다. 이미 기차 끝 칸에서 입을 맞췄던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원하고 있다는 걸 감각했다. 관건은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려 있었다.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스웨덴 한림원에 의해 “개인의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했다”고 호평받았다. AFP·연합뉴스

마흔여덟의 그녀는 서른다섯 유부남인 그의 손이 바닥에 있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 때마다 자신의 다리를 스치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 앞에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했다. 그날 밤, 그녀는 그의 방에서 나서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용기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1988년 9월 25일, 그녀는 A의 방에서 동료 대부분이 나가자 그와 서로 맹렬하게 껴안았다. 실수로 현관의 불이 켜지자, 두 사람은 곧 자리를 옮겼다. 둘의 외투와 가방, 재킷들이 거침없이 벗겨져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가 불을 껐고, 열정이 시작됐다. 그녀는 완벽한 격정 속에서 밤을 보냈다.

“나 역시 조금도 조심스럽게 굴거나 수줍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옛날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아름다움, 열정, 욕망일 뿐.”(‘탐닉’, 19쪽)

그녀는 파리로 돌아온 뒤에도 1990년 4월 그가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비밀스러운 내연 관계를 이어왔다. 피부를 하얗게 타고 올라오는 맨살, 세포 구멍마다 벌겋게 부풀어오는 열기, 관이 리드미컬하게 삐걱거리는 것 같은 사랑…. 그가 소련으로 돌아간 뒤, 그녀는 그와의 열정을 차분하게 기록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이 용감하게 호명한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사진) 이야기다. 수상자 에르노에 대해, 스웨덴 한림원은 “개인의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했다”고 평했다. 프랑스 작가로선 16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이고, 프랑스 여성 작가로선 처음이다.

에르노의 1991년작 ‘단순한 열정’은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에 근무하는 유부남 A와 2년여 불륜을 회고하는 프랑스 여성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작가는 레닌그라드에서 격정적인 하룻밤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어간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준다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10-11쪽)

열정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감수성이나 감정마저 바꿨지만, 쾌락의 몸짓이 더해질수록 시간의 질서 속에서 서서히 마모하고 식어갔다. 사랑과 열정이 사라진 뒤에 비로소 깨닫는다. 누구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은 행복이라고, 일상을 넘어선 어떤 사치라고.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고.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66-67쪽)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서술의 사실성과 선정성 탓에 평단과 독자층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국내에선 2001년 처음 소개됐고, 2012년 문학동네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다시 출간됐다.

노벨문학상이 호명한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녀의 문학 세계와 특징은 무엇일까. 국내에서 번역된 작품과 외신 기사를 토대로 살펴본다.

1940년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소도시 릴본에서 태어나 근처의 소읍 이브토에서 자란 에르노는 1974년 어린 시절과 사춘기, 가족에게 느끼는 수치심, 뿌리를 잊기 위한 노력 등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분리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했다.

자신의 결혼을 다룬 ‘얼어붙은 여자’(1981)를 발표한 그는 특히 1984년 아버지의 삶을 그린 ‘남자의 자리’를 발표해 르노도상을 받으며 작가의 지위를 굳혔다. 이때 소설 양식을 포기하고 사실과 체험에 근거한 진솔한 감정을 서술하는 그녀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게 됐다.

이후 어머니의 치매와 죽음을 다룬 ‘한 여자’(1988)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1997), 사랑의 열정과 고통을 담은 ‘단순한 열정’(1991)과 그 일기인 ‘탐닉’(2001), 낙태 체험을 다룬 ‘사건’(2000), 현대사를 기록한 ‘세월들’(2008) 등 많은 자전적 작품을 발표했다.

“내게 세상에서 견딜 수 있는 두 가지는 오로지 사랑과 글쓰기다. 나머지는 암흑”(‘탐닉’, 66쪽)이라며 에로스와 글쓰기에 천착해 온 에르노는 무엇보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선언처럼, 자전적 체험과 사유를 작품에 담아왔다. 진실을 외면하거나 비껴가는 소설이 아니라, 위험천만하지만 진실에 가닿는 자전적 문학이 되겠다는 취지였다.

이를 위해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게 아니라 체험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몸의 기억을 박제해 해부학적으로 글을 쓰는 한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치열하게 글을 썼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집착’, 9쪽)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중성적 글쓰기, 단숨에 독자의 관심을 끄는 첫 대목, 비교적 짧은 분량의 글, 담담한 문체, 오로지 사실만 기록하려는 확실성, 문단 사이의 여백…. 그녀의 글 앞에서 진실은 발가벗고 서 있고, 어떤 고급스러운 가식과 허위도 기대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노출증’이나 ‘스캔들’의 작가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따라 다녔다. 그녀는 이에 “여성 작가에서 기대하는 ‘로맨스’도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내 책이 외설로 치부되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그 진실은 내가 위험을 무릅써서 얻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며, 내가 위험을 무릅쓸 것을 요구하는 진실이지요…난 오직 그 위험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그 진실을 얻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어요.”(‘칼 같은 글쓰기’, 150쪽)

오래전, ‘단순한 열정’의 구체적 내용이 담긴 일기 ‘탐닉’을 한국어로 번역한 조용희씨는 번역 과정에서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적나라한 성 묘사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거주한 지 어언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지라 이 사회의 노골적인 성 표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침없는 에르노의 묘사를 모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면서 번역 당시 가까운 프랑스인들의 반응이 뚜렷하게 둘로 갈렸다고 전했다. 자신의 내밀하고도 은밀한 성적 사생활을 화자화한 작가에 비방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녀의 책을 너무나 감명 깊게 읽었다는 찬미론자도 있었다고.

노벨문학상이 2022년 과감하게 호명함으로써 무관심하게 팔짱 끼고 관망할 수 없게 만든 에르노와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해, 21세기 한국 독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나라한 노출과 노골적 성애에 분노와 비방을 보낼까, 아니면 위험천만한 사실을 넘어서 닿는 어떤 서글픈 진실에 잔잔한 지지를 보낼까. 열정의 몸, 탐닉의 혀, 카사노바 호텔…. 여기가, 바로 한국 문학의 최전선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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