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한 기회로 곤충표본실에 가본 일이 생각난다. 전투기를 연상케 하는 굵은 몸과 삼각형 모양의 날렵한 날개를 지닌 ‘박각시’의 표본을 직접 눈으로 보며 그 외형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박각시는 박각시과(科)에 속하는 나방류이다. 어른 벌레의 배 부분에 검은색, 붉은색, 흰색의 띠가 있어 다른 박각시 나방과 쉽게 구별된다. 박각시과 나방은 겉모습만 전투기를 닮은 것이 아니다. 일부 종은 천적인 박쥐의 초음파를 탐지하고 이를 피해 박쥐의 초음파를 교란하는 방해 초음파를 내기도 한다. 이러한 포식자와 피식자 간의 진화적 경쟁을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에 비유하는데 박각시야말로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이에 딱 맞는 예시인 셈이다.
박각시과 나방은 대부분 야행성이지만 꼬리박각시처럼 낮에 활동하는 종은 정지비행을 하며 꽃의 꿀을 빨기 때문에 종종 아메리카 대륙에만 분포하는 벌새로 착각하기도 한다. 벌새와 박각시의 정지비행은 다른 계통의 생물이 같은 환경에 적응하여 비슷한 형태와 행동을 보이는 수렴진화의 결과이다. 잠자리나 등에 등 정지비행을 하는 곤충은 많지만 나비목(目) 중에서는 초당 수십 번의 날갯짓을 할 수 있는 박각시과 나방만이 정지비행이 가능하다.
찰스 다윈은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난초의 꽃이 30㎝ 이상 깊이의 꿀주머니를 지닌 것을 보고 이 꽃의 꿀을 먹고 꽃가루를 운반하는 곤충도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40여년 후 길이가 30㎝가 넘는 주둥이를 지닌 박각시의 발견으로 증명되었고 이는 ‘공진화’(Coevolution)를 설명하는 좋은 예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박각시과 나방은 군비경쟁, 수렴진화, 공진화 등 진화의 여러 결과를 잘 보여주는 곤충이다.
크기가 꽤 커서 무서워 보이지만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발견하면 두려워 말고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해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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