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바이든 행정부와 '엇박자'… 백악관 분통
트럼프 때 임명된 인물… "임기 보장 말아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시절 임명된 세계은행(WB) 총재가 ‘기후변화’에 관해 현 미국 행정부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 설화에 휘말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분노를 표시했고 집권 민주당에선 “트럼프 사람인 WB 총재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WB는 국제기구이긴 하지만 미국이 ‘최대 주주’로서 사실상 총재 인사권을 휘두르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미 백악관 정례 브리핑에선 데이비드 맬패스(66) WB 총재의 ‘거취’가 단연 화제로 떠올랐다. 그는 지난 20일 기후변화 관련 행사에서 ‘사람들이 화석연료를 태우는 게 빠르고 위험하게 지구 온도를 상승시킨다는 과학자들 견해에 동의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이에 환경단체는 물론 기후변화 해결을 핵심 공약으로 삼은 여당 민주당에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선 “WB에 새 수장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WB 총재의 임기는 5년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재무부 차관이던 맬패스는 2019년 4월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강력한 추천으로 WB 총재가 됐다. 민주당 내부엔 ‘트럼프 사람이나 다름없는 맬패스 총재 임기를 보장해줘야 하느냐’는 기류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대통령도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카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맬패스 총재 발언에 대한 백악관 입장을 묻는 질문에 단호하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어 “WB는 금융 분야에서 기후변화를 막는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미 행정부는 국제 금융기관들과의 협력을 담당하는 재무부를 통해 WB 지도부에 이같은 점을 분명히 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백악관은 전부터 맬패스 총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그가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를 추구하는 바이든 행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언론에서 ‘미 행정부가 맬패스 총재의 거취를 압박하고 나섰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것에 대해 장피에르 대변인은 일단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WB 총재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 20여개국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선출한다. 이 점을 들어 장피에르 대변인은 “총재 교체는 (미국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미국은 그들과의 파트너십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의 독선, 일방주의 같은 말이 나올까봐 조심스럽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WB에 지분을 가진 다른 주요국들에서도 맬패스 총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면 총재를 바꾸지 못할 것도 없다는 뉘앙스로 들린다.
WB 총재 인사권은 사실상 미국이 전적으로 행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재를 뽑는 이사회에서 각국은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경제 규모에 따라 가중치가 부여된다. 결국 세계 1위 경제대국인 미국이 원하는 인물이 총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계기로 1945년 WB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출범한 이래 현 맬패스 총재까지 역대 수장 13명이 모두 미국인이란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맬패스 총재는 ‘스스로 물러나진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사임할 생각이 없고 WB 회원국 중 나더러 물러나라고 하는 나라가 있다는 얘기도 못 들었다”고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