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가 하는 편의점은...” 2018년 가을 무렵, 소설가 김호연은 대학 과선배가 운영하는 서울 문래동의 편의점을 찾았다. 선배는 5, 6개월 정도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한 뒤 가게를 차렸다. 편의점에서 열심히 일하는 선배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학생 및 사회운동을 해온 선배는 접객을 해본 경험이 없는데다가 심지어 인상마저 조금 무섭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팔아준 뒤 선배와 잠시 수다를 떨었다. “참 불편할 것 같은데, 근데 되게 잘하네.”
그의 머릿속에는 우연히 자신이 선배에게 건넸던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렀다. 불편한 편의점이란 말이 지닌 형용모순, 아이러니가 마음에 들었다. 마치 ‘선량한 차별주의자’, ‘밝은 밤’, ‘친밀한 이방인’처럼. 그래, 이 제목으로 언젠가 한번 이야기를 써보자. 그 즈음 아내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엇비슷한 시기, 편의점 애호가였던 그는 친구로부터 편의점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연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회사를 명예퇴직한 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친구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편의점은 예전에는 타자화된 낯선 공간, 구멍가게를 밀어낸 공간이라는 시선이 있었다면, 지금은 동네 구멍가게 역할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편의점을 애용하고, 안 그럴 것 같지만, 그곳에서 말도 많이 하죠. 제목이 좋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 게다가 이 시대 가장 흔한 공간이니까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곧바로 집필에 착수하진 못했다. 발상과 아이디어가 생기고 모아지던 그때, 그는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스릴러 『파우스터』를 쓰고 있었다. 이듬해 봄 책을 펴냈지만, 독자의 사랑을 받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지치기도 했고 용기도 많이 잃었던 그는 이듬해 여름부터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출판사와 정식 계약도 맺지 않은 채. 전작이 실패하면서 출판사와 계약하자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계약을 하지 않고 작품을 쓰려니 집필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써서 돈을 벌면서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써야 했다. 2020년 말에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저희랑 다음 작업 언제 하실 거죠?” 그해 연말, 그는 데뷔작 『망원동 브라우스』와 『연적』을 출간하며 꾸준히 친분을 유지해온 출판사 나무옆의자의 이수철 대표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답했다. “마침 제가 끝난 원고가 하나 있는데, 한 번 보내드릴까요?”
소설가 김호연은 그해 연말 정식 출판 계약을 맺은 뒤, 지난해 4월 대중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펴냈다. 소설은 청파동의 편의점 올웨이즈(ALWAYS)를 배경으로 야간 알바로 채용된 노숙자 출신 독고가 진상 손님은 쫓아내는 한편 손님과 이웃, 직원들의 사연을 들어주면서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충고도 해주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고는 주위 사람들과의 이 같은 소통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도 회복한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눈 데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292쪽)

『불편한 편의점』은 곧 국내 출판 시장을 강타했다. 출간 2개월 뒤인 지난해 6월 ‘말리의서재’에서 처음 1위에 오르더니, 7월부터 영풍문고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며, 올해까지도 꾸준히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누적 판매 70만부. 판권도 아시아 7개국에 팔렸다.
김 작가는 지난달 다시 『불편한 편의점』 2편을 펴냈다. 2편은 새로운 주인공으로 연극배우 출신 근배씨가 등장해 1편의 독고처럼 편의점 손님과 이웃, 직원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새 인물의 등장에도 1편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비슷한 느낌도 주도록 하는 한편, 팬데믹 시대를 맞아 재기와 치유의 메시지를 좀더 강화하려 했다.
“다시 일어나 돌아가야 했다. 사람은 일어나면 가만히 서 있지 않는다. 일어나면 움직이게 되어 있고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재기이고, 정신을 차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268쪽)
『불편한 편의점』 1·2권을 합쳐 80만권 이상 팔렸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아울러 대만어판 출판을 맡은 대만 수방사가 최근 3쇄를 찍는 등 동아시아에서도 순항 중이다. 김 작가 역시 대다수 1편 독자들이 2편에도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왜 지금 사람들은 대중소설 『불편한 편의점』에 열광하는 것일까. 소설과 시나리오를 두 손에 쥔 김 작가의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김 작가를 지난 13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체격의 그는 답변 역시 거침이 없었다.
―속편 출간에 고민도 적지 않았을 텐데.
“당초 속편 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 1편에서 이미 주인공 독고의 정체를 밝혔는데, 2편을 계획했다면 독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라고 했을 것이다. 지난해 여름, 출판사의 속편 제의에 고민했다. 속편을 낸다는 건, 한편으론 영광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속편이 1편보다 좋을 수 없는데다가 자칫 잘못 내면 1편까지 욕먹을 수 있다. 고민 끝에 아이디어가 나오면 쓰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부지런히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지난해 가을쯤 2편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서 지난해 늦가을 계약을 맺은 뒤, 12월 제주로 내려가서 7개월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필에만 몰두한 끝에 올해 6월 완성할 수 있었다.”
―속편 집필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아무래도 1편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실망을 끼쳐드릴 수 없다는 부담감이 제일 컸다. 괜히 봤다, 돈만 벌려고 2권을 졸속으로 냈네, 하는 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체력적으로도 조금 힘들었다.”
―청파동에 위치한 편의점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이유는.
“어릴 때 남산 밑에서 살았고, 청파동이나 남대문 남창동 등에서 많이 놀아서 정서적으로 아는 동네인 데다가, 서울역 노숙자인 독고가 걸어갈 수 있는, 그러니까 물리적 개연성이 있는 동네여서 청파동으로 했다. 편의점 이름은 노숙자를 알바로 쓴다고 하면 싫어할 수도 있고 작품 핵심 공간만큼 상상해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해 ‘올웨이즈’라고 새롭게 지었다. 진짜 같기도 하고, 항상 열려 있고, 언제나 가져야 될 마음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았다.”
―2편 주인공인 근배는 어떻게 탄생한 캐릭터인가.
“저는 편의점 공간 자체가 작품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고, 주동 인물로 1편에선 독고와 70대 여성 사장 염 여사를 생각했다. 2편의 경우 코로나가 한창인 작년 여름을 배경으로 염 여사의 말썽꾼 아들 민식이 사장이 된 편의점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독고와 비슷한 캐릭터로 근배를 등장시켰다. 1편 중간쯤 독고에 대한 희곡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 인경이 나오는데, 인경이 준비하는 연극의 주연 배우가 바로 근배다. 팬데믹 때문에 연극이 개봉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도 남고 돈도 벌어야 해서 편의점 알바를 하며 독고 캐릭터를 체험하러 온 것으로 설정했다.(근배 캐릭터도 매력적이더라) 노숙자 티를 벗어나지 못해서 말을 더듬는 ‘츤데레’ 캐릭터의 독고 같은 유니크한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배는 의외로 맷집도 있고, 말도 많고, 오지랍도 넓은 캐릭터다.”
―2편의 주요 인물 가운데 특별히 마음이 저리거나 뿌듯한 캐릭터가 있다면.
“1편이 청소년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서 2편에는 꼭 청소년 캐릭터를 한 명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민규였다. 민규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꿈도 없고 몸무게가 100kg 다 되는 학생으로, 편의점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근배를 통해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저 역시 소시민으로 자랐는데, 어릴 때 도서관이나 교회 같은 곳을 많이 돌아 다녔다. 그 시절엔 편의점이 없었다. 학교 선생이 아닌 동네 형이나 교회 선생에게 영향을 받곤 했는데, 그런 경험을 녹였다.”
―캐릭터 중심의 옴니버스식 구성이 눈에 띠는데.
“저는 작품 소재에 맞게 스토리텔링 방식을 정한다. 이번 작품은 커다란 플롯 하나가 길게 이어지고 여러 개의 서브플롯이 나오는 일반적 장편 서사와 다르다. 만약 장편 스릴러나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면 어떤 커다란 목표를 향해 주인공이 추적하는 긴 행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냥 캐릭터들의 옴니버스로 구성했다. 편의점이라는 무대에서 각 캐릭터가 배우처럼 등장해 장면을 하나씩 연기하고 나가는 게, 집중도도 높고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기도 엄청난데, 요즘 사람들이 왜 『불편한 편의점』을 찾아 읽는다고 생각하는가.
“먼저, 스토리가 따뜻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팬데믹 시대 각박하고 힘든 세상에서 불편하지만 우리가 서로 도와서 편해진다는 화두가 잘 통한 것 같다. 코로나 시대니까 따뜻한 얘기를 써야지 하고 계획해서 쓴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책을 쓰고 구상할 땐 팬데믹이 아니었다. 제 자신이 이 글을 쓸 때 힘든 시절이었고, 저 자신부터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따뜻함이나 인간의 선의에 대해 느끼는 바를 썼다. 독자들과 소통해보고 싶다는 제 노력이 시대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울러, 예상치 못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생들까지 이번 작품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대중 소설을 지향하는 저는 대중 소설의 핵심이 가독성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을 수없이 고쳐서 읽기 쉽고 날렵하게 썼다. 청소년들이 편의점과 친근하기도 하다. 독자층이 중고생이나 가족에게로 크게 넓어진 것 같다.”

―『불편한 편의점』은 작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계문학상 우수작이자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는 연극으로도 제작되는 등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판매부수는 그렇게 많진 않았다(그는 현재 4만부 정도 팔렸다고 했다). 이후 세 작품은 독자들과 소통이 어려웠고, 좌절도 있었다. 이번 작품으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독자와의 큰 길을 열어주고, 소설을 더 자신 있게 열심히 쓸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준 책이다(이때 그는 ‘만들어주신’이라고 존댓말을 썼다).”
2001년 첫 직장인 영화사에서 공동 작업으로 영화 「이중간첩」 에 참여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 김호연은 시나리오 작가로 잘 풀리지 않자 2003년부터 출판사 편집자로 전업했다. 처음 2년간 만화 편집자 및 기획자, 만화 스토리 작가로 일했던 그는 2005년부터 소설 편집자로 생활했다.
어릴 때 이외수나 이문열 작가의 책을 좋아했던 그는 국문과 시절 잠시 문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구체적 소설 쓰기를 배우지 못한데다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하면서 방향을 선회했다. 마침 군에서 제대할 무렵 영화 「쉬리」를 시작으로 영화와 드라마 바람이 불면서 독학으로 공부해 영화 시나리오를 보낸 끝에 영화사에 취직한 그였다.
소설을 출간해 팔아야 하는 출판사 소설 팀장으로서, 국내 작가들의 섭외가 쉽지 않아서 주로 일본 소설을 번역 출간했다. 당시 출판 시장은 영미 작가들의 장르소설이나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오쿠다 히데오 등 일본 대중소설이 휩쓸고 있었다. 해외 작가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출판사들은 거액을 주고 판권을 사야만 했다.
“왜곡된 출판 시장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출판 편집자 시각에선, 외국 작가들에게 우리 독자들을 뺏기고 있었으니까요. 대중소설 시장이 큰데, 국내 작가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요.”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는 무엇보다 대다수 한국 작가들이 대중소설을 많이 쓰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가장 커 보였다. 물론 각각 『엄마를 부탁해』와 『남한산성』을 쓴 신경숙이나 김훈, 김영하 등 일부 대가는 장르적 또는 다양한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 대중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대다수 젊고 유망한 작가들은 대중소설보다는 문학성이 강조된 단편소설을 주로 쓰고 있었다. 국내 작가들도 재밌게 읽히는 대중소설이나 미스터리나 스릴러, SF 등 다양한 장르소설을 쓴다면 우리 독자들을 뺏어올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나라도 써보자. 어느 순간, 시나리오 작가 김호연은 대중소설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미 시나리오로 장편 서사를 공부했고, 스토리도 상도 여러 번 받았지 않았던가.... 제대로 된 대중소설을 써서 외서에 빼앗긴 대중소설 시장을 되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2007년 1월, 그는 대중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다니던 출판사를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소설가 김호연의 원점이었다.
그는 이후 7년간 시나리오를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계속 장편소설을 써갔다. 소설가 데뷔를 위해 대표적 장편문학상인 세계문학상을 비롯해 문학동네소설상과 창비장편문학상 등 수많은 장편공모전에 공모했지만,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렇게 고달픈 7년의 무명작가 생활이 이어졌다.
1974년 서울에서 자영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김호연은 2013년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마침내 소설가로 데뷔했다. 7년간의 무명작가 생활이 끝나는 순간. 이때 그의 나이 만 서른아홉이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2013), 『연적』(2015), 『고스트라이터즈』(2017), 『파우스터』(2019) 등을 펴냈다.
―작품 세계를 조금 정리하면.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는 소시민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다양하고 유니크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고, 장편소설 『연적』이나 『고스트라이터즈』는 좀더 유니크한 이야기를 담았다. 『파우스터』는 정통 스릴러 작품이고. 주로 인간과 캐릭터에 대해 쓴 것 같다. 소시민이나 루저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권력이나 강자에게 저항하거나 푸념하는 내용을 주로 다룬 것 같다. 소시민이나 루저들이 반역까진 아니지만 자기들 방식으로 이 세상에 맞서고 저항하고 살아내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불편한 편의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데.
“최근엔 소설을 쓰느라 거의 못썼다. 작년 초까지 시나리오를 썼는데, 투자나 캐스팅을 기다리는 작품이 대여섯 편 되는 것 같다. 시나리오 작가 경력은 20년이 넘는다. 시나리오 작가 정체성이 있어서 소설을 안 써도 생계에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시나리오는 돈을 더 벌지만, 영화가 안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소설은 더 내밀하고 제 자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소설은 제 이야기를 완성하기 더 쉬운, 저에게 더 유리한 방식이다.(소설과 시나리오간 공통점이나 차이, 장단점은) 기본적으로 장편 대중 소설과 상업 시나리오의 스토리텔링 공식은 같다. 2시간 안에 혹은 300페이지 안에 독자를 클라이막스로 올렸다가 내려오게 하는 롤러코스터 방식이다. 실제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해 영미권이나 일본에서 많은 작가들이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오래 전부터 극작가들을 고용했는데, 극작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3장 구조를 주로 썼다. 스토리텔링 작법은 여러 가지인데, 3장 구조로 풀기도 하고, 8장이나 16장 시퀀스로 풀기도 한다. 다만 이야기 사이즈나 산업적 방식에 따라 시나리오나 소설로 구분돼 쓰여야 한다. (그 차이는) 투자 규모다. 영화는 일정한 사이즈가 있어야 한다. 남산타워가 무너지거나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이야기라면 영화로 가야하고, 「고도를 찾아서」처럼 남자 둘이 여관방에서 하루 종일 떠드는 이야기라면 영화보다는 소설로 가야 한다. 시나리오는 문체가 없고 오히려 객관적이어야 하는 반면, 소설은 자기만의 문체와 작품에 대한 작가 지향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소설의 문체와 톤, 매너가 작가의 연출이다.”

―장편쓰기 전략이나 원칙, 방법 등이 있다면.
“영화도 상업 영화가 있고 예술 영화가 있듯이, 소설도 대중 상업소설이 있고 작품성을 지향하는 예술 소설이 있는 것 같다. 저는 대중 상업소설을 쓰기 때문에 대중들이 익숙한 장르와 장편 상업 서사의 플롯을 적용해 쓴다. 예를 들면, 독자들이 캐릭터에 빨리 공감하도록 장치를 초반에 두고, 메인 사건은 이야기 5분의 1지점에서 터지도록 한다. 관람자들이 2시간짜리 영화를 볼 때 1시간 동안 주인공에게서 메인 사건이 안 일어나면 이게 예술 영화인가 하고 당황하듯, 책 역시 절반이 다되도록 주인공이 산책만 하고 주요 사건이 안 일어나면 집중도가 떨어진다. 사건은 정확한 시간에 터져줘야 한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구조를 생각하고 써야 한다. 문체는 잘 읽히는 문체, 가독성을 중시한다. 3, 4시간 동안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게 목표이기에 제일 중요한 건 가독성이다. 문학적 성취와 가독성을 둘 다 잡으면 대작가이지만, 저는 둘 다를 하기 쉽지 않아서 가독성을 우선 선택한다.”
―작가로서의 포부나 비전은.
“소설이든 대본이든, 기조를 잃지 않고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다. 소재가 영화에 어울리면 영화 시나리오로, 소설에 어울리면 소설로 쓰면 된다. 다만 지금은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됐기에 비슷한 느낌의 좋은 소설을 좀 더 쓰고 싶다. 독자들과 잘 소통할 수 있는 대중소설을 쓰고 싶다. 대본 작가의 정체성도 있으니까 좋은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싶다. 다만 지금 영화계는 투자든, 투심이든 팬데믹으로 많이 밀려 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장편 소설가 김호연은 이날 자신을 산책이나 등산 정도만 하는, 취미가 별로 없는 ‘심심한 사람’이라고 무심하게 소개했다. 심심한 사람? 둥그런 얼굴 모양에, 상고머리 같은 짧은 머리, 많은 고뇌와 경험을 담은 듯 툭 튀어나온 넓은 이마, 뭔가 깊이 몰두해온 듯한 구릿빛 얼굴, 장인의 그것 같은 덥수룩한 턱수염, 마치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처럼 날카롭게 번쩍거리는 눈빛.... 심심한 사람이라는 묘한 말이 단단한 몽돌 같은 그의 모습과 겹쳐지자 불현 듯 드는 생각, 혹시 그는 내내 소설과 시나리오의 세계에만 침잠하고 몰두해온 장인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람이란 일어나기만 하면 가만히 서 있지 않으니까.
맞아, 그는 여러 질문에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답했지. 물 흐르듯 달변이었을 뿐 아니라 길고도 자세했고. 가령 “작년 4월”을 이야기하면서 “2021년 4월”이라고 부연 설명했지. 그래, 답변 내용 역시 분명했고 단단한 알맹이도 있었어. 소설과 시나리오(작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하는 대목에선 윌리엄 포크너까지 끌어오며 자세하게, 손에 잡힐 듯 설명했으니까. 경험이든 깊은 성찰이든, 온몸으로 장악된 듯한 그의 이야기들....
지금 같은 출판 빙하기에 무려 80만부가 팔린 책을 펴낸다는 게 다만 우연이고 시대의 편승이고 운뿐이었을까. 20년 넘는 상업 영화 시나리오 집필과 네 권의 장편소설 창작으로 쌓여진 내공이 폭발한 건 아니었을까. 분명한 대중소설 지향과, 대중적 플롯 및 문체의 시도, ‘심심한 사람’으로 상징되는 집중과 몰입이 빚어낸 성취도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쉬면 안돼요.”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매주 3일 이상 전국 학교와 도서관을 찾아서 독자를 만나고 있다는 김 작가가 한 말은 내년부터 다음 작품을 준비하겠다는 거였다. “쉬면 감이 떨어지고, 두려운 게 있어요. 독자들을 만나느라고 글을 못 쓰니까 조바심 나는 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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