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교착에 우려…남북합의에는 “정부 바뀌어도 존중·이행해야 할 약속” 강조
윤석열 정권 ‘실정’에 목소리 내겠다는 의지로 볼 수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9·19 남북군사합의 4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겨레의 숙원’으로 강조하면서 퇴임 후 처음으로 현안 관련 메시지를 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미국·캐나다 3개국 순방에 오른 날 나온 이러한 메시지에,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겠다던 문 전 대통령이 진전없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우려하고 아울러 윤석열 정부도 우회 비판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일부에서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맡았던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된 축사에서 문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는 한순간도 포기할 수 없는 겨레의 숙원”이라며 “민족 생존과 번영의 길이며 세계 평화와 안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이어 “평화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고 그 누구도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며 “우리 스스로 한반도 평화를 일구는 주도자가 되어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만 한 걸음이라도 전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 전 대통령은 “아쉽게도 하노이 회담 결렬 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교착됐고, 남북과 북미 간 대화에서 더 이상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한반도에 평화를 제도화하는 것, 지속가능한 평화를 정착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절감한 시간이었다”고 아쉬움도 드러냈다.
특히 남북합의에 대해서는 “정부가 바뀌어도 마땅히 존중하고, 이행해야 할 약속”이라며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선언, 10·4 선언,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등은 모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역지사지하며 허심탄회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만들어낸 역사적 합의”라고도 강조했다. 보수와 진보 정부를 통틀어 결실 맺은 남북 간 합의 존중과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대목이다.
대화 없이 평화는 없다며 모든 대화의 출발점이 신뢰라고 한 뒤에는 그 신뢰가 남북간에 합의한 약속을 지키는 데서 시작될 거라고 문 전 대통령은 언급했다. 북한을 향해서는 “북한 역시 거듭된 합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합의 준수를 위해 남북이 함께 노력해나갈 때 신뢰가 쌓일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대화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했다.
‘적대의 역사’를 끝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전쟁 없는 한반도 시작을 만방에 알렸다고 9·19 군사합의 의의를 평가하면서, “남북군사합의서를 부속합의서로 채택해 군사적 위험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실천적 조치를 합의했다”고 문 전 대통령은 돌아봤다. 그리고는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 위협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건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며 “남북이 처음으로 비핵화 방안에 합의하며 비핵화로 가는 실질적 로드맵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축사에는 이 외에 ‘평화올림픽으로 만든 평창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한미정상회담을 성사하며 평화의 길 개척했던 경험을 거울삼아야 한다’, ‘외교·안보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우리가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주도적 입장에서 극복하고 헤쳐 나갈 때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초로 능라도경기장의 15만 평양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던 그 날의 벅찬 감동이 다시금 떠오른다’ 등 메시지도 담았다.
한미 양국이 대북 강경 기조 속에 공조를 강화하는 가운데 나온 문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현 국면 장기화 시 군사합의 등 전임 정부 성과의 백지화와 한반도 평화 후퇴를 우려한 것으로 읽힌다. 비슷한 맥락에서 정치권 일부에서는 문 전 대통령의 메시지가 유엔총회 기조연설 등이 포함된 윤 대통령의 영국 등 3개국 순방길 오른 날 나온 점에 주목한다. 윤석열 정권의 ‘실정’이라고 판단되는 부분에 문 전 대통령이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로 볼 수도 있어서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태양광 사업에 윤 대통령이 “참 개탄스럽다”고 한 데 이어 사법처리 가능성도 언급하며 전임 정부에 날을 세우는 상황에서 문 전 대통령도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시각과 궤를 같이한다. 이에 문 전 대통령 측은 국내 정치에 직접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거라는 입장으로 알려진다. 윤 대통령과 직접 대립각을 세워 전·현직 대통령이 맞부딪히는 구도는 문 전 대통령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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