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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쉭쉭” 소리나는 듯… 거침없는 일필휘지의 풍경과 만나다

입력 : 2022-09-15 21:30:00 수정 : 2022-09-15 19: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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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작가, 학고재서 개인전 ‘첫눈에’

태풍 몰아치는 대지·하늘서 본 백록담 등
고향 제주의 환경, 마음에 담아 화폭으로
근작 회화 18점·온라인서 30점 선보여

“동·서양 미술, 전통과 현대 구분 넘어서
첫 번째 느낌 포착… 그걸 공유하고 싶어”

경복궁 옆, 수백년 왕조 거리로 정돈된 느낌을 주는 삼청동 한 전시장에 멀리 제주 섬에서 실어온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태풍이 오기 직전 더없이 깨끗한 공기에 물든 아침놀의 유난한 선명함이 긴장감을 주더니(‘‘장미’의 아침 놀’), 결국 태풍은 대지 위 들풀을 사정없이 흔든다.(‘‘바비’가 온 정원’)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한 창공에 엷은 구름이 나타났다 연기처럼 사라질 듯한 모습은 천녀의 옷자락을 닮았다.(‘비천’) 그 구름 위에 몸을 실어 남한 최고(最高) 높이 한라산 백록담을 날으는 새처럼 내려다본다.(‘산상’) 뒤돌면 나타나는 커다란 무지개는 다시 한 번 천상을 경험하게 해준다.(‘구름 속에’) 벽면에 걸린 그림들이 상호 작용하며 만들어낸 특별한 기류가 전시장에 흐른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학고재에서 강요배(사진) 개인전 ‘첫눈에(At First Sight)’가 한창이다. 오프라인 전시장에서 강요배 작가의 근작 회화 18점을, 온라인갤러리인 학고재 ‘오룸’에서 30점을 선보인다.

강요배는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난 작가다. 서울대 회화과를 나와 1980년대 민중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에 합류해 사회참여적 작품을 했다. ‘제주민중항쟁사’ 연작이 대표적이다. 역사화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 제주 환경을 주로 화폭에 담아왔다. 그가 열번쯤 오른 한라산, 어느 날 하늘에 나타났다 사르르 사라져버린 구름, ‘장미’와 ‘바비’, 장난 같은 이름을 한 태풍이 무섭게 몰아치며 한 순간도 같지 않은 풍경을 포착해 그렸다.

“상상을 제약하고 그림을 구속하는 사진은 치워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그림은 기억 속 핵심만을 남기고 거침없는 일필휘지로 그려진다. 풍경 속에서 작가가 느낀 심상까지 화면에 표현한다. 작가는 2020년 펴낸 산문집 ‘풍경의 깊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비가 온 정원’(2021)

“그림의 획과 속도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쉭쉭하고 소리나게 선이 그어지지 않으면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것 같다. 속도가 있어야 하고, 선들이 벡터를 가져야 하고, 강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만지고 자연 속에 살아봐야 그런 선이 나온다는 거다. 디지털 이미지나 사진 등 인간이 가공해놓은 이미지로부터 출발하면 획이 나올 수 없다.”

평론가 이진명은 이번 전시 서문에서 강요배 회화에 담긴 것은 풍경이 아닌 의경(意景)이라 표현했다.

“작자의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이 객관적 사물이나 대상을 만나 융합하며 생성되는 의미 또는 형상. 강요배의 회화의 세계는 의경의 세계다.”

 

학고재 측은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고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동양적 자연관이 깔려있고, 자신의 감정을 풍경에 투영한다”며 “서양 인상파 화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화면으로 나아가나, 기저에는 동양적 사고가 깔려 동·서양 구분 자체를 무효화한다”고 설명한다.

더 쉬운 말을 쓰고 싶었던 것인지, 작가는 ‘첫눈에’라는 전시 제목을 직접 붙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가 이렇게 설명했다.

‘산상(山上)’(2022)

“첫 번째 오는 큰 느낌이 상당히 소중합니다. 설명은 조금 나중에, 이론적인 내용도 조금 나중에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동양미술 서양미술 이런 걸 넘어서, 전통 현대 이런 걸 넘어서, 구상 추상을 넘어서, 그런 분류법에 갇히지 말고, 그저 첫 번째 오는 보편적 느낌이 있다면 그걸 포착하고 공유하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곁들였어요.”

 

한국 현대 미술사는 모더니스트 추상화가들과 리얼리스트 민중미술가들이 논쟁하며 써 왔다. 강요배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이진명은 “모더니스트 회화에는 삶의 내용이 결여돼 있다. 반면 리얼리스트 회화는 개념을 축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요배는 삶과 개념의 무게를 영원한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형식의 풍경화다. 힘과 속도, 벡터와 강약이 더불어 용솟음치는 무대(arena)를 만들었다. 이러한 힘과 속도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강요배 회화의 진수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다.”

‘가을 풀섶’(2022) 학고재 제공

우리에겐 우리에게 맞는 옷이 필요하다.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우리 환경에 적합한 집이 필요하다. 미술 역시 우리에게 맞는 미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책무로 여긴 듯, 강요배는 자기 미술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림과 글,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고향에 살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도 싶다. “우리는 표현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살아가는 과정의 부산물이 표현이지.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바람 속에서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무슨 재료로 그리는지 물으면 아크릴물감이라는 대답 대신 “물로 그린다” 답하고, 자신의 그림이 구상화냐 추상화냐 물으면 “추상화(化)돼 가고 있다”고 도인 같은 답을 내놓는다. 100만년 전 용암이 솟구쳐 만들어진 섬에서 바람을 맞으며 사는 그와 기름진 문명의 오염이 어울리지 않기에, 그의 선문답 같은 대답에 연신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얼굴은 말할 때마다 총기 어린 청년의 눈빛과 인자한 어르신의 웃음 짓는 표정을 마치 제주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게 오간다. 그림은 작가 얼굴을 닮는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칠정을 그림에 담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기쁨에서 출발했는데 잠깐 여유를 갖고 가만히 보다보면 눈물도 나오고 분노도 치솟게 하고. 그것이 계속 일어나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 그림이 진짜 그림이에요.”

그가 산문집에서 한 말은 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 큰 힌트를 준다.

“만일 미술이라는 것이 막대한 금력의 기반 위에만 구축되는 거대한 건조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그 기반이 무너질 때 하루아침에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미술이 사람들의 마음밭에 뿌리내려 자라는 나무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쉽사리 죽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9월30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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