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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하나의 ‘레이어’라면, 한 권의 소설 역시 레이어”

입력 : 2022-09-13 19:05:00 수정 : 2022-09-13 18: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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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딜리터’로 돌아온 소설가 김중혁

현실 속 사람·물건 없애는 ‘딜리터’ 개념에
‘다차원 공간’ 결합해 독특한 세계관 선보여

장편쓰기는 머리보다 온몸으로 쓰는 느낌
마라톤처럼 하이라이트서 환희·격정 생겨

이미지 편집프로그램 포토샵에도 능한 소설가 김중혁은 어느 날 포토샵의 ‘레이어(layer)’ 기능과 그 발상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레이어는 이미지를 여러 겹으로 쌓으면서 편집하는 툴. 레이어라는 발상이 현실 세계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레이어 아이디어를 하버드대 이론물리학자 리사 랜들(Lisa Randall)의 ‘다차원 공간’ 개념과 연결해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음, 그렇다면… 비록 우리가 현실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어 같은 또 다른 세계나 우주가 있는 건 아닐까.

소설가 김중혁이 세계는 여러 겹의 레이어로 이뤄져 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장편소설 ‘딜리터’를 펴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마음껏 상상해 보고 묘사하는 기쁨 같은 걸 느꼈다”고 말했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제공

레이어 아이디어를 오래전부터 확장해 보고 싶었던 개념 ‘딜리터(deleter)’와도 연결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2014년 발표한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서 마치 인터넷에서 정보를 지우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없애거나 지워주는 딜리터를 처음 등장시켰던 그는 이후부터 딜리터 개념을 확장해보고 싶었다.

다차원 공간 및 레이어 아이디어와, 다른 레이어로 사람이나 사물을 보내주는 딜리터 아이디어를 결합하자 한 편의 소설이 나왔다. 그리하여 그는 1년 전부터 먼저 소설로 선보인 후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CJ ENM과 블러썸크리에이티브의 프로젝트 두 번째 작품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판타지나 장르소설 문법을 잘 몰라서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써나갔다. 자연히 이야기는 처음 CJ 측에 보냈던 시놉시스와 많이 달라질 수밖에.

“레이어와 딜리터 이야기를 판타지처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장르소설을 읽고 공부하면서 소설을 썼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판타지 공간이 소설 속에서 이렇게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지요.”

소설가 김중혁이 세계는 여러 겹의 레이어로 이뤄져 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이 세계에서 한 번쯤 사라지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한 판타지 장편소설 ‘딜리터’(자이언트북스)를 들고 돌아왔다.

주인공 강치우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지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이들의 의뢰를 받아서 이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돕는 딜리터다. 그는 딜리팅 대가로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소설가 및 딜리터로 승승장구하던 강치우는 어느 날 자신이 딜리팅한 존재들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다른 겹의 레이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 조이수와 함께 여정을 시작하는데.

소설가 김중혁은 왜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타지 소설을 써야 했을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 6일 전화로 만났다. 중저음의 그의 목소리는 느릿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밀고 가는 어떤 힘 같은 게 느껴졌다.

―소설가이자 딜리터인 주인공 강치우는 어떻게 태어났는지.

“딜리터가 하는 일을 생각했을 때 뭔가를 지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동시키는 사람일 수도 있고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 같더라. 딜리터의 일 혹은 이 과정을 의논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까 소설가인 것 같았다. 딜리팅 과정이 소설을 쓰는 일이고, 소설가가 그 일에 적격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됐다.”

―강치우가 책점을 치는 소설 도입부는 인상적이더라.

“강치우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책점이다. 아울러 책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도 한다. 글을 쓰는 사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환원시키고, 텍스트로 번역해 정보를 입수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 자신의 운명도 텍스트로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주인공이 소설가여서 김 작가로 오해할 여지도 있을 텐데.

“출판사와 얘기를 하거나 책 관련 행사를 한다는 점 등은 비슷하다. 하지만 작가가 건물을 소유한 소설 속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럭셔리한 소설가가 나왔는데, 비현실적이면서도 재미있는 부분도 있더라. 좀 비현실적이지만 소설가를 한번 등장시켜보고 싶었다.”

―다른 레이어(세계)를 볼 수 있는 초능력자 조이수는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

“파일은 읽기나 쓰기 하나만 가능하거나, 쓰기와 읽기 모두 가능한 경우도 있다. 레이어 역시 레이어를 보는 것만 가능한 사람이 있고 레이어를 보지 못하지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레이어라는 세계를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없기에 파트너를 만들어 서로 보완하도록 했다. 강치우는 레이어를 보지 못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고, 조이수는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사람이다.”

―이번 장편은 김중혁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장르적 특성 때문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이전에도 좀비나 SF 장르소설을 쓰기도 했고 새 장르를 쓴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소설은 소설가, 글 쓰는 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전과 조금 달랐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됐던 것 같다. 앞으로 글을 쓴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1971년 김천에서 나고 자란 김중혁은 2000년 문학잡지 ‘문학과사회’에 중편소설 ’펭귄뉴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좀비들’(2010), ‘미스터 모노레일’(2011),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2014), ‘나는 농담이다’(2016), ‘내일은 초인간’(2019) 등을, 소설집으로 ‘펭귄뉴스’(2006), ‘악기들의 도서관’(2008), ‘1F/B1’(2012), ‘가짜 팔로 하는 포옹’(2015), ‘스마일’(2022) 등을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심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장편 쓰기의 즐거움은 꼽는다면.

“긴 시간 마라톤처럼 달려서 하이라이트 부분을 쓸 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적으로 환희랄까 격정, 쾌감 같은 게 생길 때가 있다. 초반에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많은 선택을 해야 하지만, 작품의 5분의 4지점쯤 되면 작가가 선택할 건 별로 없고 기본 조건을 가지고 마무리를 짓기 때문에 머리로 쓰기보다 온몸으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가 되게 재미있는 순간이다.”

발칙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티키타카 문장이 인상적인 소설가 김중혁은 지난 4월 인터뷰 이후 자신의 생활에 큰 변화가 없다고 했지만, 기자는 두 번째 인터뷰를 한 뒤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그가 현실 세계와 다른 레이어에서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한 사람이 가지는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이때 지난 4월 인터뷰 내용도 설핏 눈으로 들어왔다. “바깥 활동은 독방에서 혼자 글 쓰는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저의 경우 두 개가 병행돼야 글도 잘 써지고, 일도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맞아, 그가 말하는 스펙트럼이라는 게 다른 레이어의 교묘한 흔적이라면…. 혹시, 그렇다면….

“현실이 하나의 레이어라면, 한 권의 소설 역시 하나의 레이어 같다.” 더구나 그는 ‘작가의 말’에서 삶뿐만 아니라 소설조차 다른 레이어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읽은 소설이 무수히 많은 레이어로 쌓였고, 내가 만든 이야기를 그사이에 슬쩍 끼워 넣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면 현실 레이어와 소설 레이어를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오 마이 갓! 삶도 다른 레이어인데, 소설마저 다른 레이어라면…. 음, 그렇다면…. 다른 레이어의 소설가 김중혁과 그의 소설 이야기를 전하는 이 기사도 다른 레이어에서 온 것일지도. 그러니, 쉿!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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