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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룰루랄라, 엄마 밥 먹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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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9-08 21:52:25 수정 : 2022-09-08 21: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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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해주는 건 누구를 살리는 일
어머니들은 그렇게 우리를 키워내
명절은 제일 귀한 엄마 밥 먹는 날
이제 그 밥 먹을 수 없어 서글퍼져

엄마는 열일곱에 시집을 갔다. 시부모와 시조부모, 시동생에 일꾼들까지, 한 끼 상만 예닐곱 번 차려야 했다. 종일 부뚜막 앞을 지키고 앉아 있노라면 눈물이 났단다. 명색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생 솥뚜껑만 보고 살다 죽겠구나 싶어서. 그 엄마 똑 닮아 나도 밥하는 게 싫다. 먹는 즐거움을 몰라 그런가 싶기도 하다. 맛있는 것 먹자고 한참 걷는 것도 모자라 차까지 타는 사람들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맛집도 밝히지 않는다. 줄 서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옆집 아무 데나 가서 허기나 다스리면 그만이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 살았다. 엄마 모시기 전까지.

엄마 모신 지난 팔 년 동안 매일 두 끼 밥을 차렸다. 소식하는 엄마가 하루 두 끼만 드시는 게 천만다행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엄마는 달고 느끼해 싫다며 외식도 마다하신다. 서너 집뿐인 산골이라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는 배달도 일절 되지 않는다. 그러니 끼니마다 새로 밥을 할밖에. 손질된 채로 사서 냉동시켜 놓은 생선이나 한 마리 굽고 전기밥솥에 밥 안치고 한 솥 끓여 얼려놓은 사골이나 데우는 주제에 그마저 투덜투덜,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정지아 소설가

냉장고도 없던 시절 어머니들은 하루 세 번 밥을 해서 우리를 키웠다. 요즘처럼 손질된 생선이나 팔기를 하나, 가스레인지가 있나, 한여름에도 아궁이에 불을 피웠고, 숯을 긁어모아 찌개를 끓이거나 생선을 구웠다. 나더러 그때처럼 살라고 하면 남편이고 자식이고 나 몰라라, 당장 밤봇짐을 쌀 테다.

어머니 입맛에 맞춘 반찬만 하다가 오랜만에 매콤한 생채가 당겼다. 가으내 비를 맞은 상추는 조금만 손에 힘이 들어가면 뭉그러졌다. 흙이 안 나올 때까지 헹구기를 다섯 번째, 인내심에 바닥이 났다. 흙이 나오거나 말거나 씻기를 포기했다. 당연히 생채 한 볼때기 먹다가 흙을 씹었다.

“아이고, 상추랑 열무는 갓난애 다루디끼 살살 여남은 번은 씻어야 하는 법인디….”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해준 상추나 열무 생채를 먹을 때는 단 한 번도 흙을 씹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생채거리 나오는 철이면 엄마가 오후 내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엄마는 그렇게 자기 몸을 갈아 정성으로 나를 키웠다. 척추협착증은 덤으로 얻었다.

밥이 사람을 살린다. 그 당연한 이치를 나는 늘 잊고 산다. 밥을 해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업주부를 직업이 없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얼마 전까지 나도 그랬음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세상에 밥하는 일보다 위대한 일은 없다. 사람을 살리는 일 아닌가? 불가에는 밥을 짓는 공양주, 반찬을 만드는 채공(菜供), 국을 끓이는 갱두(羹頭)가 따로 있다. 밥을 짓고 반찬 만들고 국 끓이는 일이 곧 도를 깨우치는 과정인 것이다. 왜란에 불타버린 화엄사 장육전을 각황전으로 중창한 것도 밥만 짓던 공양주 스님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밥 짓는 어머니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머니들은 자식이 좋아하는 것, 자식에게 필요한 것 위주로 정성을 들여 밥을 짓는다. 자신의 입맛 따위는 언제나 뒷전이다.

추석 앞두고 친척 집들을 돌았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명절이면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끼리 선물을 주고받는다. 집집마다 벌써 추석 준비가 한창이었다. 작은엄마는 매운 음식 좋아하는 아들딸과 손자들을 위해 금값이라는 배추를 절여놓은 채 고들빼기와 부추를 다듬고 있었다(고들빼기나 부추나 다듬자면 성질 급한 사람은 욕이 나오는 대표적인 채소다). 물론 내 사촌들이 환장하는 음식이다. 작은엄마는 말수가 적고 자식들에게도 애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품이다. 하지만 자식에게 제일 맛있고 좋은 것 먹이고 싶은 그 마음은 애정 넘치는 잔소리꾼 우리 엄마와 똑같은 것이다. 명절은 다 큰 어른들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맛있는 엄마 밥을 먹는 날이다. 나도 이번 명절에는 엄마 밥을 먹고 싶다. 엄마가 너무 늙어 다시는 내게 밥을 해줄 수 없다는 게 이리도 서글플 줄이야. 엄마 밥, 열심히 먹을 걸 그랬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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