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성격·취미까지
모든 게 정반대인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의 실화
최고의 종교 지도자도
고뇌 앞에선 한낱 인간…
연민마저 들게 해
‘연기 장인’ 신구·정동환
2인극 방불케 하는 무대
엄청난 대사량 소화하며
2시간 반 동안 호흡 척척
영화와 달리
많은 장면 압축에도
밀도 있게 전개되고
몰입감 높아 큰 박수
제265대 교황에 선출된 지 7년 만인 2012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사면초가 상황에 놓인다. 바티칸 교황청은 고위 성직자가 연루된 횡령·뇌물 비리와 성추행, 돈세탁 혐의 등에 휩싸여 세상의 지탄을 받았다. 가톨릭 최고 지도자인 교황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다. 교황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하는 교황청 밖 목소리가 거세질수록 교황은 더 위축되고 괴로울 지경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아무리 해도 더 이상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막을 올린 연극 ‘두 교황’은 그해 베네딕토 16세가 사방의 공격을 피할 겸 여름휴가를 떠난 별장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을 초대하면서 본격화한다. 그 전에 두 차례 서면으로 사임을 요청했으나 답을 못 받았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마침 잘됐다며 교황 서명만 남겨둔 사임서를 들고 별장을 찾는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지위를 ‘당장 내려놓고 싶다’는 것만 같을 뿐 가치관과 성격, 취미 등 모든 게 상반된 인물이다.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16세(이하 베네딕토)는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로 완고하고 원칙적이다. 녹음 앨범을 낸 적도 있을 만큼 피아노 연주를 즐기고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아르헨티나 예수회 출신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하 베르고글리오)은 개방적인 진보주의자로 유연하고 소탈하다. 아르헨티나 출신답게 정열적인 탱고를 즐기고 축구 중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개성만큼이나 두 가톨릭 성직자의 신념 역시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베네딕토가 “자네는 담이 나쁜 것처럼 말하는구먼. 집에는 담이 있어야 하네. 아주 튼튼한 담 말이네”라고 면박하면, 베르고글리오는 “예수님이 담을 만드셨습니까? 예수님은 자비의 얼굴로 죄 많은 자를 더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자비는 담을 부술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습니다”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급기야 베르고글리오는 “시대가 (교회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교황님, 저는 더 이상 (양심적으로 홍보할 수 없는 물건을 파는) 영업사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폭탄선언을 한다.
그러자 베네딕토는 “주님이 항상 움직인다면 우리는 주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주님은 변하지 않아!”라고 폭발해버린다. 이어 “지금까지 자네가 한 말 중에 어느 것도 동의할 수가 없네”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베르고글리오는 “주님과 함께 움직이면서 변해야 한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게 격한 논쟁을 하다가도 베네딕토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담소를 나누며 결국 함께 헬기를 타고 바티칸 교황청으로 돌아온다.
이후 베네딕토는 거듭된 베르고글리오의 사임 요청을 거절한 뒤 본인이 물러날 것이라고 털어놓으며 베르고글리오를 후임으로 지목한다. “추기경님의 스타일과 방법은 나와 완전히 다르지. 말하는 것, 생각, 행동 대부분 동의하지 않소. 하지만 지금은 왜 베르고글리오라는 사람이 필요한지 이해할 것 같다오. 주님께서도 당신을 선택하실 거라고 나는 믿소”라면서.
깜짝 놀란 베르고글리오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사임하신다면 앞으로 영원히 교황의 권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라며 베네딕토에게 교황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간청한다.

팽팽하게 대립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다른 입장을 존중하며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기 시작한다. 서로 고해성사를 통해 과거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에선 ‘교황도 인간적인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구나’란 연민이 든다. 베네딕토가 “침묵. 침묵뿐이오. 더 이상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더 이상 성좌에 앉아 있을 수 없네”라며 주님에게 버려진 종이라고 결정적 사임 이유를 밝히는 장면에선 한없이 숙연해진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은 끝내 허물어지고 베르고글리오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즉위한다.
이처럼 연극 ‘두 교황’은 바티칸 역사상 598년 만에 처음으로 자진 퇴위를 발표하며 세계를 뒤흔든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그 뒤를 이은 교황 프란치스코 실화에 기반한 작품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시나리오를 쓴 앤서니 매카튼 원작으로 2019년 영국에서 초연됐고, 이후 앤서니 홉킨스(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조너선 프라이스(프란치스코 교황)가 주연한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돼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인 이번 무대는 영화만큼 감동적이고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됐다. 여기에 원로 배우 신구(86)가 베네딕토 16세를 맡기로 해 제작 단계부터 기대를 모았다.

막을 올린 무대는 연극적 특성상 영화와 달리 많은 장면과 이야기를 압축해야 했지만 그만큼 밀도 있게 전개되고 몰입감이 높았다. 이는 신구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개막 무대에서 본 신구는 연기 경력 60년의 ‘대배우’답게 배역과 일체화한 연기로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는 신의 대리자인 교황으로서의 위엄과 신 앞에서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묵직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특유의 화법에 실은 ‘독일식 유머’로 강약을 조절하며 극을 이끌었다. 사실상 2인극을 방불케 하는 무대에서 2시간30분 길이의 공연 동안 엄청난 대사량도 무리 없이 소화하며 에너지를 발산해 관객 감탄을 자아냈다. 신구는 만일을 대비해 대사가 생각나지 않을 때 일러주는 장치 ‘인이어(in-ear)’까지 처음 착용했다는데, 안 끼어도 될 만큼 관록과 연기 열정이 빛을 발했다. 상대역인 정동환도 신구에 버금가는 카리스마를 보이며 프란치스코 교황 자체가 된다. 두 연기 장인의 합이 착착 맞아 작품 완성도가 뛰어나다.
이 작품이 지닌 매력과 힘은 가톨릭 내부나 최고 종교지도자 간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시대가 직면한 문제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정서를 깨우쳐주는 이야기란 점이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태도로 갈등하고 분노하며 대립하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다르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이해된다’는 태도로 용서·화해·사랑하며 함께 사는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이다.
신구와 정동환 못지않게 쟁쟁한 배우들인 서인석·서상원(교황 베네딕토 16세)·남명렬(프란치스코 교황)이 번갈아 연기한다. 정수영(브리지타 수녀)·정재은(소피아 수녀)·조휘(젊은 베르고글리오)도 출연한다. 10월23일까지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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