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요리 탄생 프로 찬탄감
중고품 활용 ‘브리콜라주’ 작품 등
잉여에 가치 부여한 순간 큰 의미
몇 년 전에 TV에서 인기리에 방영했던 ‘냉장고를 부탁해’는 이름난 주방장들이 주어진 시간 내에 한정된 재료만으로 순발력 있게 창작 요리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연예인의 집 냉장고를 통째로 스튜디오에 가져다 놓고 공개한다는 설정이 특이했다. 냉장고의 주인들은 대부분 특정 요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장보기를 한 장본인으로, 살림에는 만년 초보들이었다. 며칠 묵은 야채가 냉장 칸 여기저기에 뒹굴고, 사놓고 처분하지 못하여 유통기간을 넘길 뻔한 식재료는 급히 냉동고에 들어가느라 뭐가 뭔지도 알 수 없게 얼려져 있다. 경험상 짐작하건대, 결국엔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고 말 운명이다.
음식을 버리는 기준은 명확하다. 첫째는 상했을 때, 둘째는 맛없을 때다. 그래서 음식쓰레기는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들 받아들인다. 이름 모를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은 생길지언정 버리는 결정에 대한 망설임은 비교적 적은 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집에 있는 다른 물건들은 버릴 구실을 마땅히 찾기 어려워서, 더는 손대지 않게 된 경우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속 남아있게 된다. 안 쓰는 물건이 내 방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만족감을 준다거나 결핍의 느낌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잉여’임에 틀림없다.

잉여란 당장 설레지 않고 선뜻 내키지도 않기에 선발되지 못하는 존재들, 하지만 언젠가는 어떻게든 쓰일 날이 있으리라고 여겨진 기약 없는 후보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은 내 물품 목록 속에 있었다는 것조차 잊힌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경과하면, 사용가능한 후보가 아닌 버려질 후보로 바뀌어 있다. 어느새 쓰레기가 된 것이다.
‘잉여’라는 단어로 현대사회의 섭리를 풀어낸 폴란드 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잉여가 쓰레기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비단 물건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두루 적용된다고 지적한다. 깔끔한 정리 설계의 기본은 주변의 모든 것을 가치있는 것과 없는 것, 또는 쓸모있는 것과 쓰레기로 분류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사람도 그런 분류법에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쓰임새가 없어져서 열외로 밀려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한때는 새것의 후광을 지녔던 물건이 필요 없어진 채로 구석에 놓인 것을 보고 마음이 찡하다면, 혹시 동병상련의 심정은 아닐지.
‘냉장고를 부탁해’의 묘미는, 싱싱하고 진귀한 재료가 들어간 품위 넘치는 요리에 있지 않다. 그런 요리는 예외 없이 항상 근사하다. 하지만 썩 어울리지 않는 남은 재료들을 가지고 ‘뜻밖의’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어 선보일 때는 찬탄의 소리가 나온다. 각종 첨단 장비들 대신 한정된 기구와 중고 기성품만으로 창의적으로 엮어 붙인 작업의 결과물들이 간혹 전시장에 예술품으로 등장한다.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우리 말로는 잡동사니들의 조합이라고 할까.
올여름 서울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미국 예술가 톰 삭스(Tom Sachs)의 작품이 그 예다. 톰 삭스는 너무 쉽게 결정 내리는 가벼운 소비행위와 우리가 사들이는 물건의 짧은 수명에 의문을 제기한다. 필요하면 바로 구매하면 된다는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에, 편리한 쇼핑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찜찜함을 느끼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작업하는 것이다. 추억의 옛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에서 만능 수리공이자 창조자 맥가이버를 방불케 하는 그는 화장실용 세면대나 파이프, 구식 모니터, 플라스틱 용기 등을 활용한 브리콜라주 방식을 독창적으로 조각에 끌어왔다.
20세기 초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거리에 버려진, 쓸모는 없을지 모르나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것들을 예술적 소재로 주워 담는다는 의미에서 예술가들을 넝마주이라고 불렀다. 여전히 예술적 상상력은 버려지기 직전의 물건들 속에 숨 쉬고, 예술적 찬탄은 잉여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에 집중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