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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사료 분석… ‘통일신라 불교 확산의 거점’ 역사 규명

입력 : 2022-08-27 01:00:00 수정 : 2022-08-26 20: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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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잃어버린 200년/무진/글항아리/ 2만5000원


전남 구례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는 아직까지 창건 시기와 창건주에 관한 정확한 사실관계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것은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의 여러 종파가 통합될 때 선종에 흡수되면서 화엄종의 명맥이 끊긴 데다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절이 소실되면서 많은 사료를 잃었기 때문이다.

무진/글항아리/ 2만5000원

물론 ‘신라 진흥왕 5년인 서기 544년 즈음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에 의해 창건됐다’는 ‘화엄사 사적’ 등의 일부 기록도 있긴 하지만, 그 진위가 확실치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부관장과 문화국장을 역임한 스님인 저자는 화엄사와 연기 법사와 관련한 다양한 사료와 9세기 활동한 선사 17명의 일대기를 담은 비문 등을 비교 검토하고 화엄사 가람 배치를 분석해 화엄사의 초기 200년의 규명을 시도했다.

저자에 따르면, 신라는 660년과 668년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지만 삼국 통일이라는 관념은 크지 않았다. 대신 삼한 정벌의 관념을 더 크게 가졌다. 통일신라는 이에 따라 옛 백제와 고구려 땅에 8세기 중반까지 사찰을 건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덕왕이 재위하던 8세기 중반, 통일신라는 옛 백제와 고구려 땅에도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연기 법사가 창건한 화엄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화엄사는 8세기 중반 황룡사 출신 연기 법사에 의해 불경 ‘화엄경’을 종지로 하는 화엄종 사찰로 창건됐다는 것이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를 구경했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로, 명승 연기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이 있는데, 전각이 몹시 밝고 산뜻했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 화두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에서 조사라고 불렀다.”(남효은, ‘추강선생문집’ 중에서)

저자에 따르면, 화엄사는 곧 통일신라 불교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거점 사찰이 됐다. 9세기 중반 이후 지리산 권역과 호남 지역 승려의 비구계 수계를 담당하는 판관 사찰의 역할을 담당했고, 828년 대렴의 차씨를 화엄사에 심기 시작하면서 차 문화를 한반도 전역으로 퍼지도록 했다. 특히 9세기 중후반 하나둘 선문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이들 선문을 이끈 선사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화엄사 출신 선사들이었다.

저자는 그동안 화엄사의 사적을 설명해온 ‘화엄사 사적’이 잃어버린 화엄사의 사격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내용에서 역사성을 결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창건 시기를 왜곡하고 창건주 연기를 배제해 화엄사 정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정확한 화엄사의 초기 역사를 규명해 화엄사의 위대한 시기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용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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