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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필요한 책을 꺼내드는데 무언가 툭, 발등으로 떨어졌다. 사진이었다. 사진의 하얀 뒷면이 위로 향해 있어 어떤 사진인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하지 않아? 어서 확인해 봐.” 판타지 영화나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그 사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복권의 당첨번호를 확인할 때처럼 설렘 같은 것이 살짝 마음 한끝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어떤 사진일까. 가끔 그렇게 예기치 않게 불쑥 현재로 소환된 과거는 순식간에 나를 그 당시로 데려갔다. 사진은 일종의 타임머신이었다. 고맙고 감사하게도 지난 시절들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어떤 때는 민망한 적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부끄러워 얼굴이 뜨듯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증오와 분노보다는 애틋함이 먼저 돋아나는 것을 보니 그리 나쁜 시간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평소 과거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은 성격이라 그렇게나마 불쑥,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옛날을 회상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집어 들고 확인해보니 소설 습작 시절, 동인들과 함께 바다 근처 마을에 사시는 선생님 댁을 찾은 날 찍은 사진이었다. 수십 년 전, 내 생의 한때가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사진 속 우리 모두는. 당시 우리는 지지부진한 현실에 불만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또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선생님은 그저 열심히 하라고만 하셨다.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우리는 자괴감과 함께 선생님을 원망했다. 그때 우리는 다들 열심히 했으므로. 열심히 책도 읽고, 열심히 습작도 하고, 열심히 사람도 사랑했으니까. 한데 열심히 해도 그때는 되지 않았다. 그저 코끼리 코 자세로 제자리만 도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열심히 했으므로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말처럼 공허한 말이 또 없다. 그때 우리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탈출할 수 있도록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거나, 길을 찾을 수 있는 신화 속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한데 세월이 흘러 지금 그 동인들은 모두 작가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글로 남기고 있다. 삶의 목표를 잃지 않고 열심히 몸부림을 친 결과다.

한데 살아보니 그게 끝이 아니고, 전부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숙제처럼 그만한 노력과 분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겠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끊임없이 산등성이를 올라가야 하는 시시포스가 바로 우리라는 것도 알겠다. 지금 다들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어쩌랴. 살아내야 하는 것을. 포기하고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우리 모두 어느 지점엔가는 닿아 있을 것이다. 그곳의 풍경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살아내다 보면 또 다른 내가, 혹은 우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해 가는 그 길에 부디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기를!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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