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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음식 넘쳐 땅에 묻기도… 나치 포로들의 ‘풍요로운 감방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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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21 06:00:00 수정 : 2022-06-21 02: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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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미국에서 악기를 배운 포로들

2차 대전 때 獨 포로 37만명 美 이송
제네바 협약 준수해 인도주의적 대우
식량·교육 제공… 노동 땐 임금 지급
“입대 전보다 좋아… 천국 같은 생활”
기부 악기로 음악회 열고 축구대회도
용병 등 비정규군은 보호 명시 안 돼
독일 전쟁 포로들은 미국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수업도 듣고 악기도 배우는 등 제네바 협정에 따른 좋은 대우를 받았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해서 러시아군과 싸우다가 잡힌 세 명의 외국인에게 ‘테러리즘’을 저지른 죄로 사형이 선고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영국인 두 명과 모로코인 한 명으로,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한 많은 외국인 용병의 일부다. 이 판결이 나오자 영국에서는 “소련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형식적인 재판”이라며 “제네바 협약에 의해서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측 주장의 근거는 이들이 우크라이나 해병대에 소속되어 싸웠기 때문에 정식 군인이며 ‘테러범’이 아닌 ‘전쟁 포로’라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법적 지위를 갖고 있다.

전쟁 포로가 특별한 법적 보호를 받게 된 건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전쟁의 시초라고 생각하는 이 전쟁에서는 양쪽 진영 모두에서 대규모 전쟁 포로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합의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들은 제멋대로 살해되거나 끔찍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도시국가나 제국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국민 국가(nation state)에서 의무로 강제 동원된 병사들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의도와는 무관하게 총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포로로 잡혀서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단지 적이라고 해서 굶기고 죽이는 일은 비인도적인 처사였다. 서구 국가들은 1차 대전을 겪은 후 자국민이 적군에 잡혀 비참한 대우를 받거나 살해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그 유명한 ‘제네바 협약’이다.

뉴스나 영화를 통해 접하게 되는 제네바 협약은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포로에 관한 협약은 1929년에 만들어진 3차 협약이다. 1차와 2차 제네바 협약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864년, 1906년에 이미 체결되었다. 다만 이 협약들은 각각 육상 전투와 해상 전부에서 발생한 부상자, 병자, 조난자에 대한 처우에 합의한 것이었고, 1929년에야 비로소 다치지 않고 생포된 전쟁 포로들에 대한 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상대를 죽이려는 전쟁에서 적군을 인도주의적으로 대우하자는 약속은 모순적, 혹은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된 적군을 죽이는 것은 그저 잔혹한 보복행위일 뿐 전쟁의 일부는 아니다. 따라서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3차) 제네바 협약은 인류의 진보를 보여주는 성과물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만) 이런 국가들 사이 약속은 처음부터 잘 지켜진 것도 아니고, 지금도 완벽하게 지켜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쪽이 약속을 어겼다고 해도 그 상대와 이미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A라는 나라에서는 적국인 B의 전쟁 포로들을 협약에 따라 잘 돌봐주고 있는데 B국가는 생포한 A국가의 포로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가혹하게 대할 경우 A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제네바 협약이 체결된 후 일어난 2차 대전 중 발생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수십 년 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 있는데 바로 미국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싸우다가 생포한 적국 병사들을 대거 미국 본토로 이송해왔다는 사실이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 포로 37만1000명, 이탈리아군 포로 5만1000명, 그리고 일본군 포로 4000명이 미국으로 이송되어 47개 주에 만들어진 수용소 200여 곳에 수감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48개의 주가 있었기 때문에 버몬트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 전쟁 포로수용소가 세워진 셈이다. (하와이는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았지만 포로를 수용했다.) 한 수용소가 언어가 다른 외국 군인들을 많게는 8000명까지 수용했다고 하니 미국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에는 40만명이 넘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남부 앨라배마주 앨리스빌이라는 작은 마을의 경우 주민의 숫자는 1500명이었는데 그 마을에 세워진 포로수용소에는 주민의 네 배가 넘는 6000명의 독일 포로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다가 항복하고 체포된 병사들로, 화물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넜다. 큰 화물칸에 앉기도 힘들 만큼 빽빽하게 채워져서 미국으로 왔다고 하니 노예선을 연상시키지만 그렇게 도착한 후 비밀리에 열차에 옮겨타고 도착한 수용소에서는 (한 독일군 포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국 같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10여년 전 앞서 생긴 제네바 협약을 잘 지키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병력들에 제네바 협약의 세부사항들을 교육시킨 것도 모자라 사무실 등에 어떤 행위가 협약 위반행위인지를 강조하는 포스터도 붙였다고 한다. 게다가 포로들이 배고프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음식을 충분히 공급했는데 햄과 옥수수는 양이 너무 많아 미처 처분하지 못해서 포로들이 몰래 땅에 묻는 일도 있었다.

독일군 포로 중에는 자신이 입대 전에 살던 환경보다 수용소의 시설이 더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만큼 1940년대 기준으로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게다가 일손이 필요한 주변 농장에 가서 노동을 하면 협약에 명시된 대로 소액의 임금도 받았고, 수용소 내에 학교도 있어서 원하는 포로는 각종 수업을 듣고 심지어 주변 대학교로부터 우편을 통한 통신강좌로 학점강의도 이수했다. 또한 주변 지역에서 기부한 악기로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져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음악회를 열기도 했고, 축구대회를 할 때는 관중이 수용소로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비판적인 미국인들도 있었다. “우리 군인들은 남의 땅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싸우는데, 우리 병사들을 죽이던 적군은 미국 땅에 와서 풍족하게 먹고 즐기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였다. 당시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는데 포로들은 음식이 남는다며 땅에 묻을 정도였으니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문제가 불거져 결국 의회 청문회까지 열려서 포로수용소 총책임자가 나와 제네바 협약 준수에 관한 해명을 해야 했다.

더 큰 반발은 “정작 우리의 적국들은 미군 포로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청문회가 열린 지 한 달 만에 독일군이 생포한 미군 병사 84명을 무방비 상태에서 기관총으로 학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미국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제네바 협약을 끝까지 준수하기로 한 것은 “적들이 약속을 깬다고 해서 우리도 깬다면 우리도 저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라는 미국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국인들도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알카에다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서 잡은 포로들은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정규군이 아닌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에 협약에 따른 대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포로로 잡은 외국인 용병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대우하지 않아도 항의하기 힘든 것은 협약은 용병, 민병대와 같은 비정규군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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