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꿈 접고 법대로
이병주 ‘소설 알렉산드리아’
고3 시절 우연히 읽고 충격
지식인 자의식에 깊은 감동
법학 전공하기로 극적 결심
법학자·관료로 명성
서른둘에 대기업 나와 유학
워싱턴DC서 변호사로 활약
서울대 교수 거쳐 법대 학장
인권위원장 등 다양한 활동
13년 만에 펴낸 ‘李평전’
‘한국의 발자크’ 꿈꾼 이병주
작품이 곧 대한민국 현대史
72년에 걸친 굴곡진 삶 추적
기록 없는 부분까지 살려내
법학은 ‘어른의 학문’
이성적 제도 만드는 게 법학
난 인문학적 배경 갖고 공부
이젠 뭘 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해야 되는가 고민

일본 유학을 마치고 출세를 꿈꾸다가 사상범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황제’ 같은 형은 동생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유명 카바레에서 피리 부는 악사로 일하는 동생 ‘프린스 김’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형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이 같은 내용의 이병주의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부산고 3학년생 안경환은 신생 월간지 ‘세대’ 1965년 6월호에서 우연히 읽게 됐다. 이 작가의 자전적인 삶을 담은 소설은 그가 5·16 쿠데타 직후 사상범으로 몰려 2년7개월을 복역한 뒤 발표한 데뷔작이었다. 고교생은 현대사의 수레바퀴 속에 깔린 지식인의 자의식과 이데올로기, 서사가 담긴 소설을 읽고 충격적인 감동으로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는 5·16 직후여서 군사정권이 혁신계를 다 잡아넣을 때였죠.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았거든요. ‘이 작품을 써서 이 사람 또 감옥 가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고 그랬어요.”
서울대 법대 교수가 된 안경환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동아일보에 문학 작품 속에 담긴 법적 쟁점을 다룬 ‘법과 문학 사이’를 연재하면서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소개했다. 대학생이던 1968년 이 작가를 처음 대면했던 그는 198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공공연히 엄호하는 이 작가와 충돌하기도 했다. 쿠데타 주범 전두환을 엄호하는 것만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작가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켜켜이 쌓여 갔다.

안 교수가 이병주의 평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작가와 공통점이 많던 언론인 황용주 평전을 집필하면서부터였다. 2009년 황용주 평전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병주가 일본 유학과 학병 징집, 언론계 활동에서 황용주와 공통점이 많은 데다가 1960년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세 사람이 자주 어울렸다는 걸 알고서 동시에 쓰기로 결심했다.
한국 현대사와 그 이면을 수많은 군상을 통해 다양하고 풍성하게 그려내며 ‘한국의 발자크’를 꿈꿨던 이병주(1921∼1992) 작가의 일대기를 그린 안경환의 ‘이병주평전’은 이렇게 우리 곁에 다가왔다. 두툼한 982쪽짜리 ‘이병주평전’은 72년에 걸친 이 작가의 굴곡진 삶과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말해 온 이병주는 장편소설만 80여편에 이르는 등 100권 이상의 작품을 펴낸 다산의 작가. 그의 작품 세계는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정국, 한국전쟁, 이승만 시대, 박정희 시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소설로 읽는 한국 현대사’라 부른다.
1987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한 안 교수 역시 수십권에 이르는 법학서는 물론 이례적으로 셰익스피어 연구서를 비롯해 문학 책자, 4권의 평전 등 번역서와 단행본만 무려 70여권 펴냈고, 서울대 법대 학장과 국가인권위원장(제4대)도 지낸 대표적인 ‘르네상스인’이다.

르네상스인 안경환은 왜 문제적 작가 이병주의 평전을 써야 했을까. 그의 삶에는 어떤 고비들이 있었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안 교수를 지난 6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2009년에 시작했다면 무려 13년 만입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는지요.
“개인적으로 퇴임한 뒤에도 1년에 한 권꼴로 책을 내 왔어요. 이병주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어야 했고, 확인해야 할 자료도 많았죠. 주요 작품은 여러 번 읽었고, 관련 논문과 평가도 다 읽어야 했어요. 시간이 많이 걸렸죠. 10년 이상 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하는 학회에 갔고요. 그냥 앉아서 쓴 게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려웠나요) 이 작가의 인생에서 교토 시절(1939∼1940) 기록이 없어 추적이 불가능했어요. 다른 자료를 붙여서 분위기만 냈죠. 엇갈린 평가와 증언도 애로사항이었고요. 애초 썼던 분량(약 8000매)에서 절반 이하로 줄이는 것(약 3500매)도 힘들었고요.”
―이병주 작가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어떤 위치입니까.
“제가 근현대 한국 소설을 거의 다 읽은 김윤식 전 서울대 교수의 마지막 시기에 가깝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물었죠. ‘선생님, 수많은 한국문학사에서 명멸했던 무수한 별 중에 단 하나만 고르라면 하면 누굴 고르겠습니까.’ 사실은 그렇게 물으면 안 되는, 상당히 무식한 질문이죠. 김 교수는 한참 고민하더니, ‘한 명만 고르라 하면 이병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라고 하더라고요. 이 작가는 주류 문단에서 외면한 사람이어서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이병주 작품을 다 합치면 대한민국 전체 삶이잖아’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작품을 통해 대한민국 역사와 국민 전체의 삶을 다양하게 담아낸 작가는 이병주 작가밖에 없죠.”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했고 인문학 공부를 꿈꿨던 부산고 3학년생 안경환은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은 뒤 법대 진학으로 방향을 극적으로 선회하게 된다. 부산고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인문대 진학을 꿈꾸고 있던 그로선 극적이라고 할 만했다. 왜냐하면 개인 성향도 그렇고, 독서 성향 역시 인문학 쪽을 지향해 왔으니까.
하지만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충격적인 감동 속에 읽은 뒤, 그는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아버지나 윗대 가족이 인문학 때문에 이병주처럼 힘들게 살았던 기억도 떠올랐고, 인문대로 진학하지 말라는 주변 만류도 거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문학을 공부한 뒤 먹고사는 길도 막막해 보였다. 그는 결국 부산고 동기 17명과 함께 1966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1948년 밀양에서 교사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안경환은 197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 시절 삶과 학문에 영향을 미친 은사를 만나게 된다. 바로 서양사학자 김성식(1908∼1986)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다.
아버지의 작고로 대학원을 중단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던 그는 1980년 직장 생활을 접고 서른둘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샌타클래라대 로스쿨을 마쳤다. 미국 워싱턴DC에서 한동안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1987년 서울대 교수에 임용돼 2013년까지 근무했다. 현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와 베이징이공대 법학원 영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법학서, 특히 인권 관련 법학서도 많이 내셨는데, 법학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법학이란 종합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사 과정의 세부 전공에서 창의적이고 뛰어난 사람들은 그 길로 가되, 그다음으로 덜 뛰어나고 덜 창의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하나의 이성, 이성적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 남의 얘기 잘 듣고 분석하는 사람이 법학을 공부해야 됩니다. 법학은 천재의 학문이 아니고, 어른의 학문입니다. 천재는 여러 실험을 하기에 결함이 많지만, 그런 것을 다 챙겨주고 결함을 보충해 줘 가면서 사회 제도로 튼튼한 기초, 이성적인 제도를 만드는 게 법학이죠. 저는 여기에 인문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법학을 한 사람이고요. 제가 역사를 들여다보거나 문학하는 것은 소수자 관점에서 사회적 균형을 잡는 데 조금 애를 써보겠다는 취지이죠.”
―서울대 법대 학장(2002∼2004), 국가인권위원장(2006∼2009) 등 다양한 활동도 했습니다.
“법대 학장 때에는 인적 구성 다원화를 위해 최초로 비서울대 출신 교수와 여성 교수를 채용했습니다. 비서울대 외국인 교수와 ‘과학기술과 법’ 강좌 등을 통해 자연과학 출신 교수도 채용했고요. 학부에선 최초로 장애인 학생을 입학시켰죠. 공동체가 다양해야 힘이 생긴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국가인권위원장도 했는데, 당시 우리 인권 상황이 내부적으로 불만이 많아도 국제적 수준에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국제화 사업을 많이 했죠.”

―2017년 문재인정부 첫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20대 때 상대방의 도장을 위조해 결혼 신고했다가 무효가 선고된 일로 자진 사퇴하셨는데요.
“사실 제가 법무부 장관을 할 ‘군번’이 아니었죠. 아마 제가 서울대 법대 학장을 할 때 당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검찰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법무정책위원장을 맡게 된 게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이후 지속적으로 검찰개혁에 대한 글을 썼고요. 은퇴해서 중국에 가 있는 사람을 불러서….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가 있으시다면 조금 들려주시죠.
“지금 이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해야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작업을 하나 해놓고 다음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를 하기에 대체로 많은 작업이 10여년씩 걸립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 밑천이 별로 없고요.”
단정한 정장 차림의 노학자, 아니 노작가는 인터뷰 내내 꼿꼿함과 예의를 잃지 않았고, 말투 역시 꾸미거나 군더더기가 없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지하철역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그의 언행을 다시 떠올려 보자니, 문득 어떤 나무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작가와의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기자에게 새겨진 것은 ‘이병주평전’ 이야기도, 노학자의 삶과 학문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그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특별한 오락이나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골프 역시 치지 않는다”며. 서너 개의 독서 모임도 쓰기도 계속하겠다며. “지금 이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해야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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