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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쿠르상 『아노말리』 르 텔리에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대면하신다면 당신의 선택은”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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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08 07:30:00 수정 : 2022-06-08 12:32:51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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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스물도 되지 않는 젊은 보르헤스는 1969년 어느 아침 영국 케임브리지의 찰스강이 바라보이는 벤치에서 앉아서 1918년 스위스 제네바의 벤치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칠십대의 또다른 보르헤스와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서로 소통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십 년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일 이 아침과 이 만남이 꿈이라면 우리 각자는 서로 꿈꾸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여겨야 하겠지. 아마 우리는 이미 꿈꾸기를 멈췄는지도, 아니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어찌됐든 우리의 명백한 의무는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과 눈으로 보고 숨 쉬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네.”(「타인」 중에서)

 

특히 늙은 보르헤스는 1918년 이후에 벌어지는 역사와 문학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만일 당신이 나였다면, 1918년에 자신이 보르헤스라고 밝힌 한 노신사와의 만남을 잊어버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느냐”라고 묻자, 1969년의 젊은 보르헤스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

 

젊은 주인공이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늙은 자신과 대면한다는 설정을 담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타인(The Other)」을 읽고서, 몇 해 전 프랑스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는 자신의 분신과 대면하는 상상을 했다. 어느 날 외모는 물론 경험, 기억까지 같은 자신의 분신과 대면하게 된다면. 그는 이를 처음 단편으로 쓰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서로 다른 여러 인물들이 똑같이 자기 분신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쪽으로 관심사를 확장시켰다.

 

“보통 소설을 쓰는 방식과 완전히 반대로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소설이라고 한다면 한 명의 주인공이 있고, 이 주인공이 여러 다른 상황을 겪어나가며 진실과 이면을 탐색하게 되는데, 저는 반대로 한 거죠. 모두 똑같은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한 후에, 여러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았죠.”

 

르 텔리에는 자신의 분신과 대면하는 여러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스케치를 해봤다. 살인부터 무관심하거나 협력적인 태도, 분신에 대한 코칭, 자기희생까지. 자신의 분신 대면 상황에 대한 반응을 8개 유형으로 구분한 뒤 자기 살인을 하는 유형으로 살인 청부업자 캐릭터를, 자기희생을 하는 유형으로 임신을 하게 된 젊은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식으로 각 리액션에 맞는 인물을 역으로 구상했다. 처음에는 16명을 생각했다가 최종적으로 8명으로 압축했다.

 

자신의 분신 대면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서 인간 실존을 다채롭게 탐색한 르 텔리에의 장편 『아노말리』는 이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아노말리’는 ‘이상’, ‘변칙’이라는 뜻으로, 주로 기상학이나 데이터과학에서 ‘이상 현상’, ‘차이 값’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작품은 2020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공쿠르상은 노벨문학상, 부커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소설은 파리발 뉴욕행 여객기가 3개월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분신처럼 똑같은 사람들을 싣고 동일 지점에서 난기류를 겪은 전대미문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2021년 3월 파리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청부살인 업자 블레이크,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빅토르 미젤, 동성애자인 뮤지션, 아버지로 인해 말 못 할 비밀을 품은 어린 소녀, 나이차가 나는 두 연인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실은 뉴욕행 비행기가 공포의 난기류를 만난다. 그런데 이 여객기는 석 달 뒤인 6월에도 동일한 승객을 싣고 동일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난다. 전대미문의 사건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여객기를 뉴저지 공군 기지로 비상 착륙시키고 극비리에 과학자를 소집해 비밀을 캐내려 한다. 3개월이라는 시차를 두고 3월 승객과 6월 승객은 자신들의 분신을 대면하면서 삶의 진실과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세계의 이 느릿한 떨림을, 이 한없이 미세한 박동을 정의할 단어는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떨림은 지구 곳곳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아칸소의 통나무집 난롯가에서 잠자던 고양이와 보르도에서 하늘을 나는 회색기러기에게, 잠베지강의 폭포와 티끌 한 점 없는 안나푸르나 설산에, 베네치아 대운하의 리알토 다리와 다라비 빈민가의 꽉 막힌 도로와 몽주의 어느 싱크대 옆에 놓여 있는 더러운 수세미와 뭄바이 정비소 마당의 펑크 난 낡은 타이어와....”(472쪽)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는 공쿠르상 수상작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많이 팔렸다. 기존 수상작들이 30~40만부가 판매된 반면 그의 책은 3배가 넘는 110만부가 팔렸다. 평단과 독자,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은 셈이다. 이미 4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작품 『아노말리』는 어떻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었을까. 작가 르 텔리에는 어떤 문학 세계를 그려왔고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아노말리』의 국내 출간과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차 내한한 르 텔리에를 지난 2일 서울 정동 한식당에서 한국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그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길고도 구체적으로 대답했다.

 

―분신이라는 주제는 문학 및 문화사에서 오래된 주제인데요.

 

“제가 써보고 싶었던 분신이라는 발상은 문화계에선 이미 오래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길가메시 이야기나 그리스 신화에도 나오고 현대 문학에서도 많이 다뤄지는 모티브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분신을 둘러싸고 4개의 큰 주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좀 클래식한데,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신이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 동침을 하고, 이런저런 인간으로서 삶을 누리잖아요. 두 번째는 적이라는 개념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적이라는 개념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도 나오고 『지킬 앤 하이드』도 그런 개념이라고 볼 수 있고, 칼비노 소설에서도 이런 개념이 나옵니다. 우리 안에 천사와 악마가 둘이 공존하는 것을 암시하는 건 매우 흥미롭지요. 적도, 악마도 원래는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는, 『아노말리』가 다루는 것과도 유사한데, 바로 거울 효과, 거울 이론입니다. 자기 자신과 대면했을 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제3의 시각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대표적인 예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들 수 있습니다. 도리안 그레이는 그림에서 점점 늙어가는 10개의 서로 다른 얼굴을 보게 되는데, 모두 다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네 번째 주제는, 제가 『아노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진짜 자기 자신과의 대면입니다. 적도 아니고, 사칭 인물도 아니고, 단순히 거울 효과로서의 자신이 아닌, 진짜 자신과의 대면인 것이죠. 이것 역시 새로운 건 아닙니다. 문학이든 영화든 어떤 예술 분야에서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만, 접근 방식을 좀 달리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분신과의 조우 또는 대면이라는 구체적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호르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 「타인」을 읽고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아이디어를 착안했습니다. 보르헤스의 「타인」을 읽으면서 진짜 재미있다,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논리적으로는 약간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편 『아노말리』에서 3개월이라는 시차,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106일 간의 시차를 뒀습니다. 106일이라는 시간은 자기가 자신과 대면을 했을 때 물리적으로 겉모습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시간임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 삶 속에선 본질적이고 커다란 변화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울러 제가 어렸을 때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와 가까운 소설이기도 합니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의 특징은 각 장마다 새로운 소설이 시작되고, 계속 다른 이야기들이 나타나면서 그 전의 주인공들이 없어지는 거죠. 재미있게 읽었지만, 동시에 각 장에 나오는 인물들에 애착을 가지게 됐는데 그 인물들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새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짜증도 나고 화가 났어요. 제 소설에선 각 인물이 나타나면서 계속해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되지만 각 인물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은 한국어와 체계가 다른 프랑스어 칼리그램으로 돼 있어서 번역하기 까다로웠을 겁니다. 제가 마지막 장을 이렇게 구상한 이유는 세상의 소멸, 즉 소설의 소멸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죠.(보르헤스 작품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준 것인가요) 보르헤스는 오래 전에 읽은 작가이지만, 저의 단편 세계를 구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작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현대 작가 세 분을 말한다면 로맹가리(Romain Gary)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보르헤스입니다.”

 

―소설에선 자신의 분신과 조우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과학적 설명이 나오는데요.

 

“저는 소설이 실질적인 변화나 교훈을 주는 우화 성격을 띠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분신 출현에 사실적인 설명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해 선택한 것이 ‘시뮬레이션 가설(Simulation hypothesis)’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해낸 건 아니고, 몇 년 전 컨퍼런스에서 스웨덴 닉 보스트롬 교수가 제기한 이른바 ‘보스트롬 가설’입니다.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에서도 다뤄지고 있죠.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 또는 가상공간이라고 하는 가설은 문학적으로 멋진 은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독자 입장에서 소설은 세계에 대한 은유죠. 독자들이 이 세계로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실제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을 강도로 마음을 줍니다. 어떤 가상의 인물들에게 갖는 애착은 실제 친구나 지인과 비교해 봤을 때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소설 『보바리 부인』과 『데이비드 카퍼필드』 속의 인물들에 많은 심리적 애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가상 세계라는 발상은 아주 흥미롭군요) 저는 독자들이 자율적으로 독서해 가면서 상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칼 포퍼에 따르면, 시뮬레이션 자체는 비과학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인데요. 만약 우리가 가상세계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이 가상세계를 통제하는 누군가가 증명이 불가능하도록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공유하고 싶은 정보가 있는데, 1주일 전 구글은 인간의 뇌를 억제할 수 있다고 발표했고, 어떤 연구 집단은 우리가 가상세계에 살고 있을 확률이 47%라고 발표했죠.”

 

―만약 자신의 분신을 대면한다면 그에게 어떤 삶을 부여하고 싶으신지요.

 

“저는, 예를 들면, 누가 길을 가다가 저를 확 밀면, 제가 밀렸어도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는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만약, 제가 3개월 뒤 집에 들어갔는데, 또다른 제가 집에 살고 있다면, 저는 타협을 하고 얘기를 해보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볼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 삶을 살다 보면, 여러 갈림길이 있고, 인생이 급류를 타는 순간들도 있으며,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되는 순간들도 있지요.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거나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게 대부분인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거죠. 그럴 때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바꿀 수가 있을까, 동시에 본질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 것들은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요. 예를 들면, 냉장고 속에 있는 음식들이나 자동차, 아파트도 나눌 수 있고, 심지어 부모나 아이도 나눌 수 있죠. 소설을 써가면서 느낀 것은, 제 의지로 결정하고 저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관과, 존재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사랑하는 존재들은 우리가 나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평단(작품성)뿐만 아니라 독자(대중성)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히 염두에 두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복잡다단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우선, 자기의 분신을 가진 주인공 8명과 분신이 없는 3명 등 많은 인물이 나오는 책을 구상하니까 편집자는 인물이 많다고 걱정했지요. 저는 충분히 많은 인물들이 있어야 여러 방식의 리액션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고 문학적으로도 잘 작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 각 인물 특성에 맞는 문학적 장르로 텍스트와 문체를 구현하려고 했죠. 예를 들면, 살인 청부업자 이야기는 스릴러 법칙을 지켜가면서 글을 썼고, 작가 빅토르 미젤의 이야기를 쓸 때는 문학 분석적인 장르로 만들었으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성 커플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떤 장르가 맞을지를 고심하는 등 각 인물에 맞는 문학적인 스타일을 부여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아울러, 등장인물이 많아 독자들의 집중력을 끝까지 끌고 가기가 좀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독자를 놓지 않기 위해 베스트셀러나 페이지터너(page―turner)들이 갖고 있는 코드를 적용시키기도 했고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뒤가 궁금해지도록 끊기를 하는 거죠. 한편으론, 요즘 젊은 사람들도 좋아할 만한 것들을 떠올리며 글을 썼고요. 이 책은 오래 전에 젊은 제가 썼을 법한 책인데, 지금의 제가 활용할 수 있고 활용하길 원하는 코드들을 접목시켜서 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대중적인 소설을 쓰길 원하거든요.”

 

―공쿠르상 수상 전후는 어떠했나요.

 

“공쿠르 수상작 가운데 특이하게도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쿠르상 수상작은 30만~40만 부 정도 팔리는데, 제 책은 3배가 판매됐으니까요. 이런저런 이유들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는 나중에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공쿠르상 수상 발표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서점들이 문을 열기 전에는 수상작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수상작을 발표한 날은 봉쇄령이 해제돼 서점들이 문을 여는 날이었습니다. 봉쇄령이 풀리고 서점이 문을 열게 되니까, 모두가 서점으로 돌진한 거죠. 제가 그 덕을 좀 봤다고 생각하고요. 안타까운 것은 미디어에서 다루는 몇몇 책들만 팔리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서점에 가면 오랜 시간 돌아다니며 책을 골라서 10만 권 당 한 권이 선택됐다면, 지금은 유명 작가나 인기작 100권 가운데 하나를 고르게 되면서 작품 풀이 좁아진 거죠. 아울러 책은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기 전인 2019년 1월 마감했는데, 어쩌다 보니 책 속 이야기나 서사 등이 코로나 이후 프랑스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어요. 여행도 못하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책의 배경이 국제적인 데다가 사람들도 많이 나오면서 좀 더 인기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고요. 제목도 한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목 『아노말리』는 변칙이라는 뜻인데, 그다지 시크하고 멋진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갈리마르출판사는 처음 싫어했지만, 제가 고집해서 출판이 됐습니다. 그런데 2020년이 되니까, 속되게 얘기하면,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는 제목이 돼서 멋진 제목이 돼버렸어요. 책은 몇 개월 동안 봉쇄령이 지속돼 좌절감에 쌓여 있던 프랑스 사람들에게 탈출구가 됐거나 두려움에 대해 일종의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에르베 르 텔리에는 17, 18세 무렵부터 단편 소설을 쓰곤 했다. 그는 당시 이들 단편 소설을 출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그가 쓴 단편 소설을 읽어본 한 친구가 그의 작품을 출판사 편집자에게 보내버렸다.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출판사 측은 르 텔리에의 단편을 맘에 들어 하면서 오케이라고 말했다. 34세가 되던 1991년, 그의 단편소설을 모은 소설집 『소나테스 드 바(Sonates de bar)』가 출간됐다.

 

1957년 파리에서 태어난 르 텔리에는 1991년 단편소설집 『소나테스 드 바』와 이듬해 장편소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설(Le Voleur de nostalgie)』를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등단 이후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희곡, 시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써냈다. 『사랑에 대해 실컷 말한』(2009), 『액체로 된 이야기』(2012), 『모든 행복한 가족』(2017), 『나와 프랑수아 미테랑』(2016) 등의 작품을 펴냈다. 블랙 유머 대상 수상, 공쿠르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세계에 대해 조금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가 쓴 30여 편의 작품을 보면 짧은 단편부터 장편 소설까지 다양하게 있습니다. 크게 3개 부문으로 나눌 수 있고요. 먼저, 짧은 작품들, 그러니까 시가 될 수도 있고 초단편이나 짧은 동화, 우화 등이 있습니다. 짧은 단편을 좋아하는 이유는 효율적이고 밀도 있는 이야기를, 서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두 번째, (장편) 소설들이 있습니다. 단편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죠. 『아노말리』는 거의 1년 만에 쓴 작품으로, 유난히 빠르게 쓴 소설이죠. 『엘렉트리코(Electrico) W』 같은 소설은 거의 14년 정도 걸리는 등 길게 가져간 작품도 있고요. 세 번째, 연극 대본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것을 써달라고 배우나 연출자가 주문을 하는 경우입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은데, 작업의 자유도가 굉장히 높기 때문이죠.”

 

특히 1992년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활동하던 국제적인 실험 문학창작 집단인 ‘울리포(OuLiPo)’에 참여했고, 2019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3년 ‘파리 저널리스트 훈련센터’를 졸업한 뒤 과학 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온 그는, 언어학 박사 학위를 가진 언어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하다. 잡지 편집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맡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활동해온 울리포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72년 전 창설된 국제적 모임인 울리포 멤버들을 보면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영국, 독일, 아르헨티나 등 다양한 국적의 멤버들로 구성이 되어 있고, 한국인 작가들도 언젠가는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창립 멤버들은 모두 사망했죠. 이 모임은 글쓰기 실험을 하는 그룹입니다. 예를 들면, 표의문자를 가지고 글을 작성한 적이 있고요.”

 

―문학과 수학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한 시간짜리 답변도 있고 오 분짜리 답변도 있습니다. 5분짜리로 할게요. 먼저 한 시간짜리 답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 드리자면, 우선 문학이라는 것은 현실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분야입니다. 문학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음유 시인들이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 성에서 저 성으로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한 것에서 비롯됐죠. 이들 이야기들은 라임도 맞고 리듬감이 있었어요. 이야기가 전승이 잘 되려면, 잘 기억되는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하고, 잘 기억되려면 수학적인 구조와도 연관이 있죠. 예를 들면, 독일어로 ‘이야기하다’와 ‘숫자를 세다’는 동사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고요. 숫자를 셀 수 있어야지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언어의 음악성, 리듬감을 잘 기억하는 반면 내용을 잘 기억하진 못하죠. 『오디세이아』 같은 경우 호메로스의 리듬감이 뇌에 뚜렷하게 각인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어가 그쪽으로 변화했다고 합니다. 언어학자로서 말하면, 숫자를 셀 수 있는 언어를 모국어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수와 언어 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죠. 영어로 3 곱하기 7이라고 얘기를 하면, 영어가 익숙한 사람들은 빨리 나오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해석을 거쳐서 수학적으로 계산한 다음에 답변하게 되죠.”

 

―한국에 대한 관심도 궁금하군요.

 

“한국을 잘 알지는 못하고, 유럽인으로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프랑스 작가 보리스 비앙(Boris Vian, 1920-1959)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의 저서 가운데 한국전쟁과 관련한 내용이 있어서 한국전쟁을 조금 알고 있고요. 과학 전문기자로 일했기에 지난 5, 60년간 한국 산업의 발전이나 대기업도 좀 알고 있죠. 제가 한국 지식을 쌓거나 배우는 것은 주로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입니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훌륭했고, 영화 「부산」 역시 흥미롭고 심도 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좀비 자체를 심층적으로 다룬다기보다는 좀비 출연으로 인해서 세상에 대한 우리 시각이 소재가 되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오징어 게임」도 재미있게 봤고요.”

 

사랑하는 연인들이 속삭이는 듯한 프랑스어 통역이 더해지면서 그날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는 길게 이어졌지만, 작가 르 텔리에의 답변은 짧고 단선적인 어떤 지식이나 대답이 아닌, 스토리와 유머뿐만 아니라 어떤 웅대한 사유를 품은 장편 소설과 같았다. 어떤 대가적인 느낌이나 인상을 숨길 수 없었던 그의 경험과 사유에 비해, 여전히 깊지 못하고 표피나 둘레에 머무른 기자의 문학적 경험과 사유가 안타까웠다. 건강을 위해선 살을 빼야 한다는 당위의 관념조차 연기처럼 사라진 기자의 뭉툭한 손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피와 과자만 자꾸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외모뿐만 아니라 경험과 기억을 기자와 똑같이 공유한 ‘나’를 만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말없이 안아주고 가볍게 등도 토닥거려줄 수 있을까, 그리하여 가벼운 미소와 함께 친절하게 말해줄 수 있을까. 고생했다고, 잘 견뎌냈다고,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 그냥 이 순간을 감각하라고, 즐겁게 자신답게 걸어가라고.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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