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베르’ 이대양 작가 인터뷰
‘남성 전업주부·공학박사’ 수식어 살려 일상툰 선봬
“작가 정식 데뷔 전 혈액암 4기 판정…처음엔 좌절”
“웹툰 그리며 항암 치료 이겨내…휴재 한 번 없어”
올림푸스 한국과 협업 ‘고잉 온 웹툰’ 시리즈 제작
“암 경험담 녹인 작품…도움됐다는 연락 많이 받아”
“일상 속 지속 가능한 행복 추구하는 것 가장 중요”

“암이 뭐 대단한 일인가요. 묵묵히 웹툰 그리며, 가족과 일상을 보내며 지내다 보니 결국 지나가더라고요.”
남성 전업주부, 공학 박사 출신 웹툰 작가... 다소 독특한 수식어가 따르는 이대양 작가(37)는 국내 1위 웹툰 플랫폼인 네이버웹툰에 입성하기 직전 예기치 않은 시련을 맞았다. 갑작스럽게 받아든 혈액암 4기 진단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인생에 찾아든 불청객이었다. 적어도 진단 초기엔 그랬다고 한다.
6월 첫째 주 ‘암 생존자 주간’을 맞아 지난달 18일 서울 강남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 작가는 “지금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해줬던 계기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당시를 담담하게 떠올렸다.
‘닥터베르’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인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에너지시스템공학과에서 석유와 석탄 등을 연구하며 박사 과정을 지냈었다. 이후 2019년 9월 네이버웹툰에서 ‘닥터앤닥터 육아일기’로 데뷔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아내와 공학 박사인 자신의 지식과 논문을 기반으로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함께 해나가는 모습을 담은 일상 툰이다. 일상을 생생히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육아 정보를 전문가의 입장에서 전달해 충성 독자들이 꽤 많다.
웹툰 준비를 시작한 지 몇 개월 만에 네이버로부터 정식 연재 제의를 받은 건 지난 2019년 7월의 일이었다. 기쁨도 잠시, 한 달 후 이 작가는 혈액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정식 연재가 결정되기 전 웹툰에만 전념하기에는 성공 가능성이 작다고 봐 낮에는 학교 연구소의 계약직으로 일했고 퇴근 후에는 웹툰을 그렸는데, 몸에 부담이 많이 됐었다”며 “정식 연재가 결정된 뒤 몸이 너무 아프길래 단순한 번아웃 증후군이나 장염인 줄 알고 연구소도 그만뒀는데, 림프종이더라”고 회상했다.
이어 “이제 막 ‘네이버 웹툰 작가’라는 타이틀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려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암 진단을 받아 처음엔 너무 억울했다”며 “한동안 그저 멍하고 막막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울분에 찬 나날을 보냈었다”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다 암 병동에서 꼬마 환자를 마주친 그는 ‘나라고 암 환자가 아닐 이유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작가는 “‘나는 암 환자구나’ 그때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며 이후 연재일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생각이 정리됐다고도 했다. 일에 집중하면서 암에 대한 걱정이나 다른 잡생각도 덜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상 툰을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상황을 보여줄 좋은 통로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걸 열심히 그리면 나중에 내가 떠나도 이 작품은 남지 않을까, 아들에게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겨줄 수 있지 않겠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후 지난 1월까지 2년6개월 동안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이 작가는 그 흔한 지각이나 펑크, 휴재 한번 없이 웹툰 작업을 해냈다.
그는 “4주에서 8주 간격으로 계속 항암 치료라는 ‘폭탄’이 놓여 있었는데 그 시기가 얼마나 힘들지, 회복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며 “미리 해놓지 않으면 펑크가 나겠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원고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항암 치료가 오히려 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얼마 전에는 암 경험담을 녹여낸 웹툰도 공개했다. 글로벌 의료기업 올림푸스한국과 협업한 ‘고잉 온 웹툰’ 시리즈로, 암 경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이들의 사회 복귀를 지지하기 위해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지난 4월18일 첫공개 후 1주 간격으로 모두 15편이 공개된다.
이 작가는 “웹툰 공개 후 많은 암 경험자분이 연락을 주셨다”며 “그중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한분께서 웹툰을 보고 마음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제 작품이 조금이라도 힘이 됐다는 것에 감사하다”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울러 “보내주신 연락 중에 ‘암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많다”며 “개인적으로 평소 대하는 ‘온도’에서 1도 정도만 높으면 충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나아가 “사실 암에 걸렸다고 삶을 크게 바꿔야 할 필요는 없고, 평소 본인의 삶을 지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작가는 고잉 온 웹툰에도 ‘주변인이 암 경험자에게 휴식을 권하기보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그는 또 ‘암 생존자’보다 ‘암 경험자’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이 작가는 “기대 수명이 빠르게 늘고 있는 시대에 암은 점점 흔한 일이 될 테고, 의학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며 “암으로 당장 죽음이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그 뒤에 남은 삶이 보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암이 ‘죽음의 병’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생에 그냥 한번쯤 겪을 수 있는 고난으로 여겨지길 바란다”고도 했다.
앞으로 3년 정도 재발이 없으면 완치 판정까지 받을 수 있다는 그는 “수많은 암 경험자분이 저를 보며, 저의 웹툰을 보며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한편 이번 인터뷰는 매년 6월 첫째 주인 암 생존자(항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완치 후 재발 없는 환자) 주간을 맞아 진행됐다. 국내에서는 2019년부터 국가 암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6월 첫째 주에 암 환자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건강한 사회복귀를 응원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8년 미국을 시작으로 다른 국가에서도 6월5일을 암생존자의 날로 지정해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