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권리 보장한 ‘로 對 웨이드 판결’
공화당서 뒤집으려 끊임 없이 노력
1850년대 의사들 이의 제기로 출발
보수 기독교인 단결시킬 중요 이슈
백악관 움직이는 유권자 집단 부상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 달성 부산물
미국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여성과 진보진영이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여성이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권한(낙태권)을 연방대법원이 보장한 1973년 판결인 로 대 웨이드(Roe v. Wade)를 완전히 뒤집는 판결문 초안이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이 결정은 빨라야 6월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대법원의 누군가가 판결문의 초안을 고의적으로 유출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판결문의 초안은 대법관 9명이 투표로 찬반을 결정해서 다수 견해를 갖게 된 법관 중 한 사람이 쓴다. 이는 최종 판결문이 아니고, 이 판결문에 대한 소수의견, 혹은 별개의견(결정에는 동의하나 법적 근거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 등이 개진되고, 그 과정에서 최종 판결문이 다듬어진다. 그런데 이번에 유출된 초안은 이런 과정이 이뤄지기 전에 만들어진, 가장 강경한 의견을 담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초안을 누가, 무슨 의도로 유출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고, 존 로버츠 미 대법원장은 유출한 사람을 반드시 색출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하지만 유출 사건과 무관하게 임신중지를 여성의 권리로 보장하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 사전에 유출됐다고 해서 대법원이 판결을 바꿀 리 없기 때문이다. 즉 미국인들은 이미 결정된 사실을 조금 미리 알게 된 것뿐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공화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몇 년 사이에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만한 보수 판사 세 명을 대법원에 밀어 넣은 결과이기 때문에 이 결과는 사실상 트럼프 집권기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왜, 언제부터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것에 이토록 열심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 위해 지난 40년 넘게 노력해온 두 세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Evangelical Christian)’이라 불리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1982년에 만들어진 이후로 미국 법원의 보수화를 주도해 온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Federalist Society)다. 전자가 정치인들에게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라는 압력을 가한 운동의 동력이었다면, 후자는 이런 압력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론을 제공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특히 트럼프 집권 4년 동안 대통령이 임명한 주요직인 연방항소법원 판사 54명 중 46명이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 출신이다. 대통령이 지명해야 할 판사 리스트를 이 그룹이 백악관에 전달한 셈이다.
그럼 보수 기독교인들은 왜 임신중지에 그토록 반대할까? 많은 사람이 성경에서 명한 대로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기독교 성경에는 임신중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 구약의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있지만, 그 밖에도 많은 다양한 명령에 대해서는 이렇게 조직적인 운동을 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의 임신중지에 대한 집착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게다가 ‘살인’이라는 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부터 태아를 ‘인간’으로 정의해야 하느냐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원래부터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을까?
그렇지 않다. 미국 내 임신중지 반대운동(이런 운동과 논리는 대개 기독교 교회를 타고 해외에도 수출된다)의 기원을 연구한 제니퍼 홀랜드 오클라호마 대학교 역사학 교수에 따르면 원래 미국인들 사이에서 임신중지가 꽤 널리 자유롭게 행해졌다고 한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필요할 경우 임신중지 시술을 했고, ‘퀴크닝(quickening)’이라고 해서 임신한 여성이 태아의 움직임을 느끼기 전에는 온전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중지에 대한 금기나 낙인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850년대에 이르면 이런 비교적 자유로운 태도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이의를 제기한 게 기독교인이나 생명운동가가 아니라 의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홀랜드 교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의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당시만 해도 의학이 지금처럼 발전하지도, 특별히 인정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의사들은 민간요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나 산파(조산사)들과 별 차이 없이 경쟁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남성들로 이루어진 당시 의사들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자신들을 과학에 근거한 진단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로 차별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방법의 하나가 태아가 언제부터 인간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배아(embryo)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런 지식은 의사들만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의학사를 연구한 사람들에 따르면 그 당시 의사들은 그만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환자나 임신부에게서 결정권을 의사에게 가져오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 결과, 1900년대 초에 이르면 미국 거의 모든 주가 임신중지를 불법화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부분 기독교인은 임신중지 이슈에 관심이 없었다. 이는 피임까지 금하는 가톨릭 교인들에게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개신교가 대부분인 미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종교사를 연구하는 랜들 바머 교수에 따르면 이런 기독교인 태도가 바뀌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없앤 진보적인 개혁이었다. 연방정부가 공립학교 내에서 인종분리를 불허하면서 많은 백인이 자녀를 복음주의 기독교 리더들이 운영하는 (백인만 입학을 허용하는) 사립학교에 보냈는데, 이런 사립학교들은 종교기관이라는 이유로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인종분리를 하는 기관은 자선단체로 볼 수 없고 따라서 이런 사립학교에도 세금을 부과하면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이익단체가 돼야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독교(개신교)인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이슈였다. 그렇게 모은 힘으로 정치인을 당선 또는 탈락시킬 수 있게 돼야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 찾아낸 정치인은 독실한 종교인임을 내세운 지미 카터(1977∼1981년 미국 대통령 재임)였다. 하지만 카터가 과격한 복음주의자들의 요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를 꺾을 후보로 로널드 레이건을 지목하고 당선시키면서 비로소 보수 기독교 리더들이 백악관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후로 조지 W.부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같은 공화당 정치인들은 미국 내 복음주의자들의 요구를 잘 들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미국 내 보수 기독교인들이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려는 수십 년 동안의 노력은 워싱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 리더들이 단결된 유권자 집단(voting bloc)을 만들어내기 위해 찾아낸 이슈였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즉 임신중지 불법화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목표’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진정한 목표(정치적 영향력)를 달성하기 위한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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