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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 해제 인파’에 울부짖은 을지로 42년 노포 “인생 송두리째 하루아침에 수포로” [밀착취재]

입력 : 2022-05-09 21:00:00 수정 : 2022-05-10 11:22:52
글·사진=김수연 인턴 기자 so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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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OB베어 철거' 항의 집회 옆…만선호프 대기 줄 ‘빽빽’
철거된 가게 터 지키는 최수영 사장 “골목 다양성 위해 상생해달라” 호소
지난 4일 서울 중구 을지로의 이른바 ‘노가리 골목’에서 영업 중인 만선호프에 인파가 꽉 들어차 있다. 을지OB베어 맞은편에서는 시민단체 회원 등이 모여 규탄 집회를 진행했다.

“저희는 여기서 울면서 부르짖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하하호호’ 영업하고 있는 모습 보면 울화가 치밀죠. 저희가 원조인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격 아니겠습니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해제되면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다같이 상생하면서 다시 꽃피울 날을 꿈꿨어요. 몇십년간의 노력과 추억 등 인생 전부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기적인 한 곳 때문에 골목 명성까지 금이 가고 있습니다. 다시 예전처럼 장사하는 것만 바랄 뿐입니다”

 

서울 중구 을지로의 이른바 ‘노가리 골목’을 42년간 지켜온 노포인 을지OB베어가 강제 철거된 지 2주일 정도 흐른 지난 4일. 최수영 을지OB베어 사장(67)은 늦은 밤까지 철거된 가게 터를 떠나지 못했다. 창업주를 이어 2대째 가게를 운영해 온 그는 “수년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눈을 뜨면 자연스레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휴일 전날이기도 했던 이날 오후 8시 무렵부터 노가리 골목 일대를 따라 기나긴 대기 줄이 형성될 정도로 인파로 북적였다. 수백개씩 펼쳐진 야외 테이블에는 노가리와 맥주를 즐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활기찬 분위기의 골목 어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뚫고 “제발 을지OB베어를 돌려달라”는 울부짖음이 간간이 섞여들었다.

 

활발히 영업 중인 다른 가게들과 달리 을지OB베어 철거 터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6평짜리 작은 가게의 정문은 유리가 깨진 채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고, 건물 앞에는 무단침입을 금지하는 경고문이 여럿 붙어있었다.

 

거리두기 해제로 손님이 몰려 매출이 상승했다는 인근 가게와는 딴 세상이다.

 

중·장년층으로 보이는 직장인 등은 시민단체의 확성기 소리에 잠시 발을 멈춰 듣는가 싶더니 이내 인근 10개 남짓의 만선호프 등으로 빈자리를 찾아 떠나기 바빴다. 젊은 고객 중에는 노골적으로 짜증 섞인 표정을 숨기지 않은 이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불콰해진 얼굴을 한 청년은 “왜 좋은 날 이 난리냐”며 “시끄러워 죽겠다”고 단체를 향해 삿대질과 욕을 하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소재 노포 을지OB베어 정문 앞에 무단침입을 금지하는 경고문 등이 붙어있다.

 

앞서 지난달 21일 새벽 법원 등이 고용한 용역 등 100여명이 을지로OB베어를 강제철거하면서 42년간의 손때가 묻은 간판과 내부 집기류 등은 전부 사라졌다. 포탈 사이트가 서비스하는 인터넷 지도에서도 흔적을 감췄다. 이후 지금까지 시민단체 회원과 주변 상인 등이 가게 앞과 맞은편 창고 쪽에서 을지OB베어를 내쫓은 만선호프를 규탄하는 집회를 날마다 열고 있다.

 

◆ 만선호프 “우리가 건물주, 문제없어”…“젠트리피케이션 가속화 우려” 지적도

 

1980년 이 자리에서 문을 연 을지로OB베어는 항상 앞에 ‘대한민국 최초의 생맥줏집’, ‘노가리 골목의 원조’ 등의 수식어가 붙었었다. 30∼40년 단골들이 많은 데서 알 수 있듯 이 골목을 지키는 터줏대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015년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 2018년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지정 등을 받으며 영원할 것 같던 이곳의 명성은 2018부터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같은 건물 1층에 입점한 만선호프 측이 세를 확장하면서부터다.

 

을지OB베어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의 이은해 활동가는 “만선호프가 높은 임대료를 앞세워 확장하면서 작은 가게들이 버티지 못하고 내쫓겼다”며 “지금은 노가리 골목이 아닌 ‘만선호프 골목’이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세입자 을지OB베어와 건물주 만선호프 간 지난한 분쟁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대계약 연장을 놓고 건물주가 제기한 명도소송에서 을지OB베어는 1심과 2심에서 패소했고,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면서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최 사장은 “건물주가 계약이 끝나는 2018년 10월 만선호프가 입주할 예정이니 우리더러 자리를 비우라고 했다”며 “우리가 안 떠나니까 만선호프 측이 급기야 우리가 입주한 건물을 지난 1월 인수했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의 이른바 ‘노가리 골목’에서 영업 중인 만선호프에 인파가 꽉 들어차 있다. 한켠에 위치한 을지OB베어 앞에는 시민단체 회원 등이 모여 만선호프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이후 만선호프와 을지OB베어 측은 보증금과 임대료를 인상하고, 을지OB베어가 그간의 강제집행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계속 장사하는 방향으로 상호 합의가 됐다고 한다.

 

그러다 돌연 만선호프 측에서 을지OB베어 소유 부지에 화장실을 새로 지을 공간을 요구하면서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는 게 최 사장의 주장이다.

 

최 사장은 “명도소송이 시작되고 난 뒤 수십년간 지켜온 가게 영업을 상생 측면에서 계속하게 해달라는 것이 저희의 바람이었다”며 “만선호프 대표가 리모델링 등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갑자기 철거를 강행한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만선호프 측은 을지OB베어가 지나치게 저렴한 월세를 내며 특혜를 누리고 리모델링 요구를 거절해 재계약이 무산된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만선호프가 세를 확장하는 것도, 을지OB베어를 강제로 내쫓는 것도 사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다. 서울시나 관할 구청 등도 법적 판결이 나온 상황에서 더는 손 쓸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법원 판결 후 철거까지 완료됐기 때문에 적극적인 중재는 어렵다”고 밝혔다.

 

노포들이 돈에 밀려 사라지는 행태는 공공성이 훼손되는 일이라는 게 시민단체의 지적이다. 정부가 100년 이상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백년가게’ 취지에 무색하게 임대료가 오르거나 건물주와 분쟁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이종건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세입자가 이렇게 계속 쫓겨나다 보면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건 뻔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최 사장은 “골목의 다양성과 전통이 누군가의 독식이 아니라 상생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법을 거스를 생각은 없지만 버틸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사진=김수연 인턴 기자 so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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