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팔 정부가 룸비니를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지라고 세계에 선포하기 2년 전, 남부 네팔에 위치한 룸비니 동산을 찾았다. 당시 철조망이 쳐져 있던 그 곳에는,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를 목욕시킨 연못과, 마야 부인을 기리는 사원이 있었다.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대왕이 ‘이곳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나셨도다’라고 새긴 흰색 돌기둥도 서 있었다. 세상에, 북한과 대치중인 우리나라 동해안이나 서해안처럼 철조망이라니.
정문 앞에는 한 노파가 가마니를 깔아놓고 흙으로 만든 못생긴 부처상을 팔고 있었다. 이른바 ‘석가모니 고행상’을 하나 사서 귀국한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그것을 놓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걱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룸비니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게 아닐까. 집에 있어도 걱정, 지하철을 타고 있어도 걱정이었다.
어느 날, 상상 속에서 부처님이 그를 조용히 불렀다. 엉금엉금 기어서 부처님에게 다가갔다. 부처님은 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놈아,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은 것 아니냐,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 그리 많노. 부처님은 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쥐어박았다. 부처님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자, 시 「산산조각」이 튀어나왔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산산조각」 전문)
실제 룸비니 부처님이 방바닥에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시 속의 장면은 창조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고, 정호승 시인은 말한다.
“걱정한다는 건 미래를, 내일을 걱정하는 거잖아요. 우리는 맨날 내일을 걱정하면서 사는 거죠. 지금도요.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그냥 열심히 살면 되는 거죠. 시의 마지막 4행이야말로 시의 핵심이죠. 지금까지 1000편 정도의 시를 쓰고 발표했는데, 가장 위안을 얻은 시 한편만 꼽으라고 하면 「산산조각」을 꼽을 수가 있어요. 저 역시 「산산조각」의 마지막 사행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거든요.”

2004년 즈음 「산산조각」이라는 시로 태어난 룸비니 부처상을 둘러싼 경험과 창조적 상상력은 몇 년 뒤 에세이로 풀어졌고, 다시 십여 년이 흐른 이번에는 우화 소설로 탄생했다. 올해 등단 반세기를 맞는 정호승 시인의 우화소설집 『산산조각』(시공사)에 포함된 단편우화 「룸비니 부처님」 이야기다.
우화소설 「룸비니 부처님」은 룸비니에서 흙으로 만든 석가모니 고행상을 사가지고 돌아온 한 남자 이야기다. 남자는 연대보증을 섰던 친구가 파산하자, 집을 팔 수밖에 없었고 해직까지 되면서 노숙자로 급전직하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룸비니 부처님의 말을 듣고서 각성을 하고, 종각역 청소를 하면서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다.
“실제 경험이나 서사가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써본 겁니다. 노숙자란 무슨 거대한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아니라, 보증을 잘못 선다거나 자영업을 하다가 망해서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땅바닥에 몸을 눕히면 그렇게 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길바닥이 주는 어떤 안온함 편안함에 길들여져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거죠. 우화 속에선 룸비니 부처님이 그 남자에게 그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정 시인의 신작 우화소설집 『산산조각』은 못생긴 불상, 망자들이 입는 수의, 참나무, 걸레, 숫돌, 해우소 받침돌 등 한국적 정서와 경험이 짙게 베인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존재 의미나 삶의 의미를 간절하게 탐색한다. 압축된 시의 묘사에 숨겨진 서사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재탄생시키고 한국적 우화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 우주 만유의 존재 의미를 묘파한 작품집이다.
시 「수선화에게」를 비롯해 주옥같은 시들을 써온 시인 정호승은 왜 한국적 우화소설을 써야 했을까. 반세기에 이른 그의 문학은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가. 정 시인을 지난 1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갈급하게 만났다. 그는 가슴 속에 고여 있던 마음을 조곤조곤 꺼내 보여주는데.
소설집 문을 여는 작품 「어떤 수의」는 상설 전시장에 걸려 있는 주머니 달린 수의 이야기다. 주머니 달린 수의를 만들어 드린다는 광고를 낸 주인은 주문을 받기 전에 무엇을 넣을 것이냐고 묻고 돈을 넣겠다고 하면 주문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털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와서 자신이 받은 사랑과 아직 받지 못한 용서를 가져가겠다고 하자 주인은 감동해서 수의를 만들지만....

―이 소설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요.
“옛날 어른들은 수의를 미리 준비하곤 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0년 전, 재봉틀로 자신의 수의를 직접 만드셨어요. 제가 다 준비할 텐데, 왜 만드시느냐. 내가 죽으면 이 수의로 해라. 저도 수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무슨 날짐승도 아니니까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옷을 입어야 하잖아요. 최소한 죽음에도 인간의 품위가 필요하니까요. 다만 망자의 옷은 주머니가 필요가 없는데, 수의에 주머니가 있다면 그 동안 받은 사랑이나 용서하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도 가져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일단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남아 있는 가족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하지 못한 다른 사람도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소설의 바탕은 그의 다섯 번째 신작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실린 시 「수의를 만드시는 어머니」에 이미 씨처럼 뿌려져 있었다.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늙은 어머니 수의를 만드신다/ ...몇날 며칠째 정성들여 그날이 오면/ 아, 그날이 오면 입고 갈 옷 손수 만드신다/ 돋보기를 끼고도 바늘귀가 안 보여/ 몇 번이나 병들어 누워 있는 나를 부른다/ 돈 없어 안안팎 명주로는 하지 못하고/ 굵은 삼베로 속곳부터 만들고/ 당목으로 안감 넣고 치마저고리 만드신다/ 죽으면 썩을 것 좋은 거 하면 뭐하노/ 내 죽으면 장의사한테 비싸게 사지 마라/ 사람은 죽는 일이 더 큰 일이다/ 숨 끊어지면 그만인데 오래 살아 주책이다/ 처녀 때처럼 신나게 재봉틀을 돌리신다”(「수의를 만드시는 어머니」 부문)
「참나무 이야기」는 대웅전 대들보나 목불이 되고 싶었던 참나무가 의지와 무관하게 장작으로 산산이 패진 뒤 선승 성철 스님의 다비장 장작으로 쓰인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묵묵히 견딜 때 비로소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시 「새」와 같은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 쓰인 참나무였다.
“새가 죽었다/ 참나무 장작으로/ 다비를 하고 나자/ 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 겨울 가야산에/ 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 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몰려왔다”(「새」 전문)
―「참나무 이야기」는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 쓰인 참나무 이야기인데요.
“성철 스님은 가야산 백련암에 계시면서 수년간 참나무 장작을 직접 패서 좌선실의 툇마루 밑에 채워 놓으셨지요. 이야기를 원택 스님에게 들었어요. 저 역시 월간지 기자였던 1980년대 후반 성철 스님과 인터뷰를 했고, 당신이 손수 팼던 장작을 봤으며, 나중에 다비식도 봤거든요. 겨울 가야산에 눈이 누덕누덕 내리는데, 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몰려왔어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새」라는 시로 썼고, 다시 산문으로 썼다가, 이번에 우화로 쓴 것이죠. 모두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거든요. 다만 모티브는 실제이지만, 결과적으로 우화하니까 픽션이죠. 스님의 법체를 태우는 다비의 불꽃이 된다는 게 얼마나 자기 존재의 의미를 기쁘게 느끼겠어요.”
또다른 우화 소설 「선암사 해우소」는 순천 선암사 차밭에서 지냈던 바윗돌이 뜻하지 않게 선암사 해우소 기둥을 받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우화 소설의 씨앗 역시 1999년 출간된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 게재된 시 「선암사」에 이미 뿌려져 있었으니.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선암사」 전문)
―해우소 받침돌 이야기라니, 무척 발칙합니다.
“선암사 해우소는 마치 기와집처럼 생겼는데, 위에서 보면 1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2층 누각입니다. 1980년대 찾았는데, 오줌을 누러 갔다가 몸속에 오물만 배출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번뇌와 망상도 함께 배출하라고 붓글씨로 쓰여 있더군요. 한 대 맞은 것 같았지요. 그때부터 좋아했어요. 1980년대 후반 여름, 다시 선암사 해우소를 찾아갔더니,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똥이 쌓이는 공간이 텅 비어 있는데, 그때 평생 인간의 분뇨 속에 갇혀 살던 주춧돌과 소나무 기둥이 보였어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인간의 똥오줌 속에 사는 선암사 해우소의 소나무 기둥과 주춧돌만큼, 저 역시 참고 견뎌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자신을 더럽히고 자신의 살을 헐어서 타자를 깨끗하게 해주는 「걸레」, 자신은 닳아지면서도 칼날을 날카롭게 해주는 「숫돌」, 곳간 바닥에 떨어져 있다가 예상치 못하게 성당의 예수 성체가 되는 「한 알의 밀」 등 주변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들이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 활보한다.

―독자들과 무엇을 느끼고 싶었는지요.
“왜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났고 아직 죽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지,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존재 가치를 젊을 때부터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 알아야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테니까요. 우화 속에 나오는 사물들은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들이죠. 하지만 인간 눈으로 봤을 때 하찮은 존재들이 정말 가치 자체가 하찮은 건가요? 그렇지는 않죠. 존재 가치를 찾아나가는 그런 과정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룰 수 있는 거예요.”
―왜 우화 소설이었는지요.
“조지 오웰의 장편 우화 『동물농장』은 가장 대표적인 우화 소설 중에 하나인데, 저는 감히 거기에 근접할 수 없어요. 제 시에는 서사가 배경으로 깔고 있거나 배경이 된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는 기본적인 어떤 상상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 상상력을 서사적 구조로 전개시킬 수가 있죠. 이번 우화소설집은 서사적 구조가 바탕이 된 시들 가운데 우화로 전환시킨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시를 쓰다 보면 시 속에 서사가 있고, 그 서사를 소설적 형태로 재탄생시키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시인인 내가 그것을 소설로 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우화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을 때 시가 소설로 재탄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과 사물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우화소설의 그릇에 담을 때 보다 자유스러운 창작의 상상력과 구성력이 주어졌다”(4쪽)고 적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로 시작되는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가르치던 김진태 국어 선생은 수업이 끝날 즈음 숙제를 하나 내줬다. 시란 행갈이를 하고, 연 구분을 하며, 자기 생각을 시의 그릇에 담는 거야. 각자 집에 가서 시 한 편씩 써와라.
학생이 살던 동네에는 범어천이 있었는데, 갈수기에 보면 자갈이 많았다. 스스로 초라하고 형편없는 존재처럼 느껴져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던 그는 천변 자갈밭을 걸어가며 생각했다. 나는 왜 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우리 집은 왜 가난한가, 나는 왜 공부도 잘하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을 선생이 가르쳐주신 대로 행갈이하고 연 구분해서 시로 썼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 쓴 시 「자갈 밭에서」였다.
교단 밑으로 내려와서 책을 들고 다니며 수업하던 김 선생은 다음 시간에 물었다. 다들 숙제해 왔나. 해왔습니다. 마침 학생의 자리까지 걸어왔던 선생은 그에게 물었다. 호승이, 숙제 해왔나. 해왔습니다. 일어나서 읽어봐. 깜짝 놀랐지만, 그는 자신이 지어온 시를 끝까지 낭독했다. 선생은 빡빡 깎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호승아,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신학기에 김진태 선생이 해준 칭찬은 시인 정호승의 문학 원점이 됐다.
1950년 하동에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정호승은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차례로 당선됐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까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나왔다.
―어떻게 문학이나 시의 세계에 들어온 겁니까.
“중학교 2학년 때 김진태 국어 선생님이 칭찬을 해 준 게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됐고요. 그 일이 있은 뒤 담임선생이 물었어요. 교내 백일장에 우리 반에서 누가 나갈까, 라고요. 정호승이 나가면 됩니다. 반 친구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그때 백일장이라는 말뜻도 몰랐어요. 100일 동안 어디 가는 줄만 알았죠. 백일장에서 불이라는 제목이 주어졌고, 「등불」이라는 시를 썼는데, 장원이 됐어요. 문학에 눈뜨게 됐죠. 어머니는 가계부로 쓰는 초등학생 노트에 연필로 시를 썼고요. 아버지는 민중서관에서 출간한 32권 짜리 『한국문학전집』을 사주는 한편, 중학교 2학년 때에는 학생 잡지 『학원』을 정기 구독시켜 줬어요. 저는 『학원』의 문학작품 현상모집에 자주 응모했지요. 중학교 2학년 때에 산문 「석의 심정」을 먼저 보냈는데, 그게 우수작이 됐고요. 이육사 선생이 다녔고 이상화 선생이 교편을 잡았던 대륜고에 입학해 문예반에 들어가니까 담당 선생도 시인이고, 다들 시 쓰는 선배들이어서 시 쪽으로 기울었죠. 경희대에 문예장학생으로 무시험 입학했고요.”
그는 등단 이후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수선화에게』 등 13권의 시집을, 동화집 『항아리』, 『연인』 등을 각각 펴냈다. 그의 많은 시들이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독일어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됐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주신다면.
“시를 쓸 때 어떠한 시를 쓰겠다고 하는 어떤 구체적인 목표나 의지가 있진 않아요. 그때그때 물 흘러가듯이, 발견하는 시를 쓰지요. 미학적 부문을 추구하는 것도 있겠지만, 저는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 어머니처럼 위로해 주는 시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다만 옛날에는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많이 생각했는데, 지금은 우선 저를 위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죠. 저는 문학성에 대해선 관심이 덜하고, 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죠. 제가 쓴 시 「수선화에게」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는데 인간의 눈물은 당연한 거지요.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니까요.”
대학 졸업 뒤 숭실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1979년부터 『샘터』나 『월간조선』 등에서 잡지사 기자를 하다가 1991년 덜컥 그만뒀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다.
“아무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는데, 쓰고 싶은 글만 쓰면서 살겠다며 직장을 그만뒀어요. 마흔 하나에 정년퇴직한다고 생각하고 그만뒀죠. 만용을 부린 거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할 일이었죠. 1980, 90년대는 시의 시대였고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같은 시집은 6개월 만에 수만 부가 팔렸지만 생활에 보탬이 되진 않았어요. 강연도 열심히 많이 다녔어요. 3년간 출판사를 위탁경영해 주기도 했고요.”
―뒤늦게 소설로도 등단했는데요.
“고등학생 때 해부학 교실에 관해 습작해놓은 단편 소설이 한 편 있었어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소설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지요. 혹시 이 작품을 투고하면 어떨까 궁금해서 보냈는데, 당선이 됐어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설 쓰기가 힘들어 마흔이 되면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잘 되지 않더라고요. 사람마다 시적 기질이나 소설적 기질 등 장르에 대한 문학적 기질이 있었지요. 저의 문학적 기질은 시였어요. 그것을 너무 늦게 40대 후반에야 깨달았지요.(1996년 무렵, 사십대 후반에 시인적 기질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고요) 시도 많이 썼지만 소설을 쓰려고 하다가 마흔일곱 살 때 시로 다시 돌아오거든요. 저는 뭐라고 해도 시인으로 존재하는 거지, 소설가로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 문학적 기질은 시, 운문 쪽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사실 우화 소설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번 우화 소설은 시의 그릇 속에 같이 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시의 또 다른 얼굴인 셈이죠.”
―많은 시들이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시 창작의 전략이나 노하우는 무엇인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는 너무 산문화해 있고 관념화, 추상화해 있어요. 유행처럼 가더라도 자기만의 시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이유는 누군가 읽는 거잖아요. 일기를 쓰는 게 아니라고요. 많은 젊은 시인들이 일기 쓰듯이 써서 세상에 내놓으니까 자기만 알고 독자들은 어려운 거예요. 살기도 어려운데, 인생도 어려운데, 시마저 어려워서야 되겠어요? 시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면서 좀 소통이 될 수 있는 시를 썼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습이 급변하기 때문에 시도 급격하게 바뀔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시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된다는 거지요. 제가 볼 때 지금 시들은 시의 본질을 80%쯤 잃은 것 같아요. 저야 이렇게 쓰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앞으로 한국 현대시가 어떻게 될지 가늠하지 못하겠어요. 윤동주, 한용운, 신경림, 황동규의 시들은 다 이해가 되잖아요. 이런 시들은 다 낡은 시이고, 이런 시들을 다 없애고 21세기 시를 써야 하는가요. 그렇지 않다고 봐요. 윤동주의 「서시」는 시대가 바뀌지만 끊임없이 생명력이 새롭게 부여되잖아요. 생명력이 끊임없이 새로 부여되는 시를 써야 된다는 거죠.”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많이 걷습니다. 하루 평균 1만보 정도 걷습니다(그가 이날 걸었던 거리라며 기자에게 보여준 것에는 7226보라고 표시돼 있었다). 많이 걷고, 근육 운동도 조금 하고요.”
정 시인의 조곤조곤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일’을 한번 시원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곳에 간다면 변과 함께 번뇌와 업장마저 모두 내려 보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스님이 바윗돌에게 했다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견딘다는 것은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희생한다는 것은 자비를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희생 없는 자비는 없다. 너는 지금 그런 희생과 자비를 통해 부처가 되는 길을 가고 있다. 나도 못가는 그 길을 너는 몸소 실천함으로써 가고 있다. 모든 똥오줌을 받아들이는 너의 마음속에는 이미 부처가 있다.”(191쪽)
상상은 대책 없이 자꾸 부풀어 가는데, 이때 갑자기 미세먼지 속에서도 멀리 남산이 드러나 눈앞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높이감이 손으로 잡힐 듯이 느껴졌는지, 복부 아래에 있던 항문의 내괄약근이 속도 모르게 조금씩 열리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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