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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엔들 잊힐 리야…정지용 고향마을에 봄 오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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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4-17 10:00:00 수정 : 2022-04-15 09: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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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시인의 생가 앞마당 황소 타고 피리 부는 소년상/담장엔 봄꽃들 소곤소곤/가는 곳마다 시인 작품 감상/골목길 담벼락에도 ‘향수’ 부르는 글과 그림

 

옥천 정지용 생가

‘내가 인제/나븨 같이/죽겠기로/나븨 같이/날라왔다/검정 비단/네 옷 가에/앉았다가/窓(창) 훤 하니/날라 간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을까.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에 발표한 작품 ‘나비’에서 시인은 나븨처럼 죽어 훤 하니 날아가겠단다. 실제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대표 작품 ‘향수’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 정지용.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그의 고향 옥천에 봄 오고 시인의 향기도 봄꽃 따라 흩날린다.

 

청석교 정지용 대표작 '향수' 조형물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고향 시인 향기 가득

 

옥천향수 100리길, 향수마을아파트, 향수주유소, 향수요양원, 향수사계절식당, 향수식품. 충북 옥천으로 접어드니 간판에서 온통 ‘향수’가 묻어난다. 단 한 사람, 정지용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옥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옥천 여행에서 정지용을 빼놓을 수 없다. 생가 주소도 옥천읍 하계리였지만 도로명 주소는 그를 기려 옥천읍 향수길로 바뀌었다. 정지용 생가 앞에 섰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라는 향수의 첫 구절처럼 생가로 이어지는 청석교 아래에는 이름 없는 작지만 정겨운 실개천이 흐른다. 모습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물은 지금도 맑고 투명하다. 지금도 이토록 아름다운 실개천이니 봄에 벚꽃이 피고 가을에 감 익어가는 사계절을 매년 지켜본 시인은 정겨운 고향을 꿈엔들 절대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용 생가 물레방아
정지용 생가 조형물

생가 앞 작은 연못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끊임없이 물을 위로, 아래로 실어 나른다. 작은 출입문에 들어서면 왼쪽 담장 옆에 황소에 올라 타 피리를 부는 소년의 조각상을 설치해 ‘향수’의 풍경이 실감난다. 조각상 뒤로 산수유 한그루가 수줍은 노란 꽃을 피워 봄을 알리고 오른쪽 담장 밑에는 명자나무에 붉은 꽃이 활짝 피어 화사하다. 단출한 3칸짜리 집과 창고가 마주보고 있으며 시선이 가는 곳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놔 그의 시어가 살아 꿈틀댄다. 담장 밑에 놓인 우물과 장독대, 부엌 문 옆을 꾸미는 돌절구와 나무절구는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오브제다.

 

정지용 생가
정지용 생가

120편의 많지 않은 작품을 남긴 정지용은 1950년 6월 ‘문예’ 8호에 발표한 작품 ‘나비’ 내용처럼 한국전쟁통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한 인민군에게 잡혀가 정치보위부에 구금됐다 납북돼 그해 9월25일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고 소문과 추측만 떠돌았다. 이에 정부는 그를 월북 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 막아버렸다. 그의 작품이 해금돼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30여년이 흐른 1988년. 생가는 1974년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에 들어섰지만 해금조치 직후 조직된 ‘지용회’를 중심으로 1996년 9월 고증을 통해 옛 모습 그대로 생가가 복원됐다. 지용회는 벽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 표지판을 붙여놨다.

 

정지용 문학관 전경
정지용 문학관 밀랍인형

◆골목길·100년 넘은 학교에서 만나는 시인의 흔적

 

시인은 14살때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고향집이 그리웠을까.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 고향을 그리면서 쓴 시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됐다. 한가로운 고향의 따뜻하고 소박한 모습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걸작이다. 시인은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표현들을 생각해냈을까. 요즘 다시 몇 번을 읽어봐도 빼어난 서정적 시어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1920∼1940년대에 활동한 시인은 절제된 감정과 정확한 사물의 묘사,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시를 빚어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지용 문학과 내부

생가 바로 옆 1996년 문을 연 정지용문학관은 문학 전시실, 영상실, 문학교실로 꾸며져 시인의 짧은 삶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밀랍인형 정지용이 관람객을 맞는데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해 옆에 앉아 사진 한 장 남긴다. 시인의 문학을 시대·연도별로 정리한 전시실에서는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정지용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정지용 시, 산문집 초간본 등 원본도 만난다.

 

정지용 생가 인근 골목길 벽화
정지용 생가 인근 골목길 벽화

문학관을 나서면 보이는 골목길에도 시인의 흔적이 담겼다. 많은 집 담벼락이 벽화로 꾸며졌는데 황소, 실개천, 달리는 말 등 ‘향수’의 내용이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으로 완성돼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옥천 여행자들에게는 인기 있는 포토존이기도 하다.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정지용이 다닌 죽향초등학교가 있다. 1909년에 개교했으니 100년이 넘었다. 시인이 공부하던 학교 건물은 1926년에 지은 근대 건축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외벽은 긴 목재를 비늘처럼 수평으로 포개며 올려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마감한 목재비늘판벽이고, 지붕은 함석을 이용해 삼각형으로 단순하게 올렸다. 복도를 따라 교실 3개가 나란히 있는 형태는 목조 교사의 일반적인 형태로 1980년대 들어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이 이곳은 2003년 6월까지 교실로 사용되면서 헐리지 않고 남아 시인의 어린 시절을 전한다.

 

정지용생가 조형물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정지용 생가 황소와 피리부는 소년상

생가에서 교동저수지 방면으로 걸어서 8분 거리엔 지용문학공원이 꾸며져 있다. 봄이면 하얀 목련과 벚꽃이 흐드러져 햇살을 즐기며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다시 정지용 생가로 돌아와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는다. 얼음장 밑으로 점점 커지는 실개천 물소리 들으며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봄을 맞이하는 소년. 집앞 넓은 들판엔 게으른 울음을 우는 얼룩빼기 황소, 밤이면 서리 까마귀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밑 흐릿한 불빛에 가족들이 돌아앉아 도란도란 수다 떠는 모습. 향수 속 풍경들이 머릿속에 실사처럼 펼쳐지며 내 고향집을 찾은듯 가슴이 따뜻해진다.


옥천=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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