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 선거의 뜨거운 감자였던 ‘여성가족부 존폐론’이 선거 이후에도 계속 쟁점화하고 있다. 정부 부처 중 예산과 인력이 가장 적은 미니부처에 이토록 관심이 집중되는 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젠더 이슈가 갖는 폭발력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온라인 커뮤니티 여론이 지나치게 과대대표 되며 ‘성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면하기 힘들어 보인다.
◆해묵은 여가부 논란의 쟁점 정리하면
최근 부상한 ‘여가부 논란’을 단순히 폐지론 찬반 근거만으로 분석하는 것은 표피적이며 비핵심적이다. 찬반론 자체는 여러번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간략히 다시 한번 요약해 본다.
1. ‘여성만 위하는 편파적 특혜 제공으로 성별 갈등을 조장한다’기엔 1조4000억 여가부 예산 90% 이상이 가족·청소년 정책, 돌봄지원에 쓰인다. 문제라면 부처 이름이 무색할 만큼 턱 없이 부족한 여성 정책, 특히 비혼 여성에 대한 관심이 소홀한 부분을 손봐야 한다.
2. ‘세금을 낭비하며 힘을 오남용’하기엔 정부 부처 중에도 가장 힘이 없어 각 지자체와 부처의 성평등 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못 하는 실정이다. 이번에 초선의원 배지를 단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이 “대안 없는 여가부 폐지보다는 ‘부총리급’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소신발언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적합한 진단이다. 다만 조 의원은 해당 발언이 윤 당선인 공약과 반한다는 당원들의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여가부 대신 가족·인구 정책을 담당할 더 큰 부처가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한 걸음 물러섰다.
3. ‘이제 성차별은 없고, 여가부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는 일각의 평가 또한 한참 시기상조다. 한국은 제도적 불합리 여부로 판단하는 ‘성불평등 지수’에서 세계 11위이지만 ‘유리천장 지수’나 ‘성별 임금 불평등’에서 수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제도는 있는데 현실에서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이 작동한다는 의미로, 이때의 제도는 오히려 ‘허울이자 면피성’이 될 수 있다. 정말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면 대학교까지 우수했던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며 급격히 무능해지기라도 한다는 걸까. 같은 스펙일 때 돈을 더 주면서까지(성별 임금격차 1위) 남성을 뽑는 것에 전통적 성역할론의 영향 등 구조적 성차별 말고 다른 합리적 설명이 가능할까.
4. ‘권력형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 역시 안희정·박원순·오거돈 사건에서 반성 없이 내 편(진영) 감싸기와 남성 권력 연대에 그친 현 정권 및 여당에 대립각 세우고 대항할 만큼 여가부가 독립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위태로운 처지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진보 진영 여성 정치인 및 운동가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피해호소인 논란’ 등도 맥락이 비슷하다. ‘진영’과 ‘여성’이 충돌할 때 여전히 진영이 앞서고 여성은 뒷전에 놓이는 현실, 남성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여성의 지위를 읽어내야 한다. 이들 여성에게 우리가 실망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것도 당연하나 이와 별개로 잊지 말아야 할 현실이다. 한두 명 스타 여성 정치인이 나오더라도 전반적인 여성 인권 향상 없이는 이러한 행태가 반복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2018년 ‘미투’, 2019년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등을 통해 빠르게 각성한 여성들의 기대에 여가부는 부응하지 못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최근 전문가 델파이 조사에서도 여가부의 한계로 ‘제한적 권한과 위상, 성차별 시정기능의 부재, 성주류화라는 본연의 기능 부족’ 등이 지적됐다.
하지만 이는 변화의 속도에 맞는 ‘여가부의 각성’, 더 강해진 실행력과 힘으로 응답할 일이지 부처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애초에 발휘할 권한을 주지도 않고서 ‘그동안 뭐 했냐’며 책상을 빼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부적절하다.
◆‘성대결 정치’ 신호탄 쏜 여가부 폐지 공약
이번 여가부 논란의 핵심은 무엇보다 ‘성대결’의 본격화에 있다. 온라인에서 극렬했던 이런 양상이 대선 국면에 양지로 끌어올려져 갈등을 적극 키운 측면이다. 여가부는 애초에 이 논쟁의 진짜 주인공이 아니다. 성대결 구도 조성이 필요한 이들, 이 대결에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 희생양으로 택한 ‘수단’에 불과하다.
여가부 논쟁은 정치권을 움직여 ‘여성’이란 이름을 붙인 부처를 없애느냐 살리느냐 하는 힘을 어느 쪽이 가지고 있느냐의 싸움이다. 이를 본능적으로 이해한 청년 여성은 고심 끝에 이번 대선에서 ‘정권심판(2번 투표)’을 유예하고 ‘여성혐오 정치를 막는 전략투표(1번 투표)’를 택했다. 이는 여성을 대하는 현 정권의 태도에 분명 크게 실망하고 낙담했음에도,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으면 그보다 심각한 암흑기가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기인한 선택이다. 다른 어떤 공약도 아닌 ‘여가부 폐지’를 대선 부진 국면의 전환 터닝포인트로 삼았다는 것이 이를 상징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여가부 폐지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배경을 보면 주장의 알맹이나 진정성이 다소 빈약하다. 우선 여가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핵심 당사자들인 여성, 청소년, 다문화가정 등에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폐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정책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여성계, 시민단체 등이 아닌 ‘반여성주의적 성향의 20∼30대 남성 여론’이 짧은 시간에 이 논의를 장악했다. 실명 기반의 오프라인 단체가 아닌 익명 기반의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키워진 담론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온라인에서는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 대신 ‘여가부가 성별 갈등을 조장한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인상평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 화력이 셌기 때문에 이 여론을 잡으려는 정치권의 ‘표(票)퓰리즘’을 태동시켰다. ‘이대남’ 표심을 겨냥한 제1야당 국민의힘이 취한 이 전략은 곧장 지지부진하던 윤석열 당시 후보의 지지율 상승, 골든크로스로 이어졌다.
당시 상황을 보면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영입 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또 다시 위기를 맞은 윤 후보가 이 대표와 우여곡절 끝에 화해한 시점이었다. 윤 후보가 페이스북에 남긴 ‘여성가족부 폐지’ 7자 공약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이 대표와의 ‘화해 시그널’이자 이번 대선을 ‘성별 대결화’하는 순간을 상징했다.
◆과대대표된 온라인 여론에 힘 실어준 ‘나쁜 정치’
무섭게 결집하는 반여성주의 청년 남성 표심을 보며 청년 여성 유권자들도 움직였다. 그 결과는 역대 최소 격차, 0.73%포인트 차이의 초박빙 승부다. 대승적 정권교체 열망, 지역주의 부활, 부동산 정책 등에 힘 입어 윤 후보가 신승을 거두긴 했지만, 이 성대결 구도의 주인공인 20대 남녀 표만 놓고 보면 투표장에 더 열심히 나온 것도, 결집력을 더 잘 보여준 것도 20대 여성 유권자였다.
대선 결과 ‘이대남’의 윤 당선인 지지율(58.7%)과 ‘이대녀’의 이재명 후보 지지율(58.0%)은 거의 비슷했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통상 20대 여론이 윤 후보에 우세했으며 20대 여성의 이 후보 지지율도 줄곧 30%대에 머무르던 것을 고려하면, 청년 여성들이 투표 직전 3∼4일 만에 약 20%포인트가량 지지율을 올리는 엄청난 정치적 힘을 증명한 셈이다.
반면 20대 남성의 경우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세대포위론’을 언급하고, 10%포인트 이상 압승에 기여하리라 예상할 만큼 컸던 온라인 화력에 비하면 윤 후보 지지율이 생각보다 낮았다. 이 같은 결과에 각계에서는 ‘이대남 여론이 청년담론으로 과대대표돼 왔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착오에 의해 ‘성별 갈라치기’가 전략으로 시도되었고, 이는 특정 세력에 분명 정치적 효능감을 안겼다. 그럼에도 ‘역대 최소 표차 승리’라는 성적표는 이 전략이 요란했던 구호에 비해 정작 별 효과는 없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동시에 혐오에 기대는 이 같은 포퓰리즘식 ‘나쁜 정치’는 지양돼야 한다는 성찰의 목소리가 여야를 막론하고 여러 차례 나왔다.
이번 대선을 통해 더욱 뜨거운 관심사가 된 ‘여가부 폐지론’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불씨가 싹터 정치권이 개입해 격화시켰고, 언론은 비판적 분석에 소홀한 사이 불길을 키웠다. 비록 실체가 불분명하더라도 공론장에 자꾸 오르면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해 조장된 성 대결 양상도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
부처 이름에서 ‘여성’을 지우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고 복잡하다. 그러나 적어도 합의해야 할 점은 여가부라는 부처가 어떻게 변하든 ‘기능 축소가 아닌 강화’, ‘전반적 여성 인권 향상’을 방향성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성평등 관점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규범적 합의는 이룰 때가 되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여가부 관련 논의를 시작할 윤 당선인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새 정부의 여가부 폐지 움직임에 여성계는 ‘역사 퇴행’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청년 여성들 역시 국민의힘에 여러 경로로 ‘여가부 폐지 반대’ 여론을 전하고 있다. 지난 1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장필화 이화여대 명예교수, 장하진 전 여가부장관 등을 비롯한 시민 8000여명은 ‘성평등정책 강화를 요구하는 여성과 시민모임’을 결성하고 “성평등 정책을 전담할 부처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힘겹게 이룩하고 지켜낸 가치들이 훼손될 위기”라며 “여가부 폐지는 ‘역사 퇴행’”이라고 강조했다.
‘페미니스트 정부’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등장한 문재인 정부마저 권력형 성폭력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초기에 28%였던 여성 장관 비율은 16%까지 주저앉히며 실망을 안겼다. 문 대통령이 공언했던 ‘남녀 동수내각’은커녕 ‘여성 장관 30%’ 약속마저 2017년 한때 잠깐 넘긴 뒤 언제 그랬냐는듯 사라졌다. 여성 유권자들은 이를 잊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끝내 ‘소신투표’를 한 적지 않은 청년 여성의 표를 민주당이 가져오지 못한 이유다.
상황이 이런데 “문 정부가 여성 장관 할당제로 뽑아서 여성의 삶이 뭐가 나아졌냐. 민생이 오히려 무너졌다”며 끝까지 ‘여성 탓’을 하는 이준석 대표의 주장은 참으로 공허하다. 제대로 지키지도 않은 여성 할당제가 ‘민생 실패의 원인’씩이나 된다니 말이다. 탓을 하자면 선언만 했을 뿐 정작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야 할 땐 뒷전에 미룬 현 정권의 ‘언행불일치’와 ‘구태의연한 남성 권력의 재탕’에 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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